(4266) 제82화 출판의 길 40년(19) 「신문관」과 육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신문관 하면 오늘의 젊은이들은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지인 『소년』을 창간했던 출판사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신문관이란 출판사는 1907년 육당 최남선이 나이 겨우 18세때에 창설했다.
육당은 이 신문관 외에도 1910년 광문회를, 그리고 1922년 7월에는 16년의 사력을 가진 신문관을 해체하고 그해 9월 새로이 동명사를 창설하여 타블로이드 36면짜리 시사주보 『동명』지를 창간했다.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1930년대의 서울 장안에서 육당은 「최미투리」라는 애칭으로 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육당은 언제나 회색 두루마기에 검정색 동정을 단 조선옷을 입었고, 삼 껍질로 삼은 미투리를 신은 채 서울거리를 활보하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의 젊은 학생들 사이에 불려지던 별호였다. 한글학자 주시경을 두고 「주보따리」라 불렀던 것과 흡사한 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대로 기울어 경각에 달려 있던 시대에 육당은 미투리를 신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리를 누볐으며, 정력적으로 신들린 듯이 일했다고 상상된다.
청년 육당은 20세에 접어들면서 건강을 몹시 해치게되어 부득이 『소년』지의 지면을 줄여서 발행하고 있었다.
육당이 『소년』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하게된 연유를 알아보자.
그는 15세때인 광무 8년에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최초로 도일한 다음 16세에 귀국하였고, 다음해인 17세에 제2차로 다시 도일하여 조도전대학 고사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대학유학생 회보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또 그해(1906년) 겨울 육당은 부친(최헌규·벼슬이 관상감에 이르고, 그뒤 한약재 무역으로 치부했다고 함)에게 우리의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하여는 미래의 동량인 청년을 계몽하고 민족정신을 고양시켜야 하는데, 이를 구현하려면 출판사업을 일으켜야한다는 그의 결심을 간곡히 사룄다.
이에 부친은 아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사업자금으로 큰 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육당은 이 돈으로 동경의 수영사로부터 인쇄기구를 장만했고, 아울러 식자를 하고 인쇄할수 있는 일본인 기술자 5명을 대동하여 귀국했다.
이 일본인 기술자들이 얼마동안이나 체류했으며 그때의 인쇄기계가 어떤 성능의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수 없으나 그 기계들로 제작한 잡지와 서적들을 보면 활자들도 각 호수가 고루 갖추어져 있고, 지금의 우리 눈으로도 그다지 설지않은 인쇄효과 등으로 보아 79년전 우리의 근대인쇄기술이 신문관을 매개로 하여 수입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육당이 창설한 세개의 출판체업적을 잠시 살펴보자.
잡지류로는 앞서 말한 『소년』외에 『붉은 저고리』 『아이들보이』 『청추』 『새별』 『동명』 『괴기』 등 모두 7종을 발행했는데, 이 가운데 『동명』과 『괴기』만이 동명사 발행이고 나머지 5종은 모두 신문관 발행이다.
일반도서로서는 육당 자신의 저서 7종을 비롯하여 63종을 발행했는데, 그중 십전총서·육전소설문고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상업적인 경장본 출판물의 효시라고 할수 있겠다. 십전총서는 1909년에, 육전소설문고는 1913년에 발간을 시작했는데 『전우치전』 『심청전』 등 고대소설을 골라 간행하였다. 십전총서는 주로 외국문예물을 번역해서 출간했다.
다음 회에서는 광문회와 동명사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정진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