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정치의 한계 드러내|막 내린 11대국회…엇갈리는 공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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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0일로 11대국회가 끝나고 11일부터 12대국회의 임기가 시작됐다. 역사 속의 한 장으로 묻히게된 11대국회에대한 평가는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것 같다.
정부 여당측은 11대국회를 대화정치가 이뤄진 새로운 국회상을 정착시킨 국회였다고 좋은 점수를 주려고 했다.
이에 반해 11대국회는 한갓 과도적인 국회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유력하다. 11대국회를 구성했던 민정-민한-국민의 3당체제가 l2대총선결과 무너진것은 11대국회에 대한 국민의 판단완료를 뜻한다는 의견이다.
이처럼 보는 입장에 따라 평가가 사뭇 다른것은 결국 11대국회가 가장 큰 성과로 내세웠던 대화정치가 한계속의 대화였고 작위적인 대화였다는 근본적인 반성 때문인 듯하다.
출발당시부터 우당체제니,l·2·3중대등으로 희화화됐던 민정-민한-국민당등 3당체제는 국민적지지를 기반으로 형성됐다기 보다 핵심야당인사들을 포함한 5백여명의 구정치인이 규
제된 제한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는」 비판을 떨쳐버릴수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구정치인 규제의 가장 큰 이유가 됐던 단상점거 농성과 같은 극한대결의 양상은 나타나
지 않았지만 그대신 야당의 무력증이 나타나 예산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거나 삭감하는시늉만 하고 말았다.
11대국회가 첫 츨발올 했던 작년 통금해제건의 국가보위법페지법등이 처리됐으나 이것은 야당측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부·여당의 완화정책의 한 표현이었었다.
한때 손도 대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았던 국회법 언론기본법 국회의원선거법등 개혁입법
이 결국 나중에는 부분적으로 개정됐다. 그러나 개정내용은 여당도 입법취지의 본뜻을 유지하고 야당은 개혁입법 개정요구를 관철시켰다는 명분을 주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예컨대 국회법을 고쳐 상임위에서 예산심의권을 부활했다고 선전했지만 국회의장이 심의기한을 정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예산안을 정치의안과 연계시켜 다룰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단을 마련해놓고 있다.
야당성을 발휘하려는 노력이 야당 일각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대세를 이루지는 못하고 현실안주파가 득세했으며, 때문에 여야협상은 야당측의 체면유지적공세와 여당의 임기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고 할수 있다.
그때문에 창녕사건·장영자사건·영동사건등 역대 어느 국회보다 대형사건 사고가 많았는데도 헌법에 규정된 국정조사권은 한번도 발동되지 못했다.
여당측은 처음에는 『무슨 문제든지 국회에서 논의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결국은 『국회는 사건을 쫓는 사건국회여서는 안된다』고 움츠러들고 말았다.
이런 사건이 터질때마다 3당대표회담이 열리고 3당3역들이 모였지만 여기서 실질적인 절충이 이뤄지기 보다는 여당측이 미리 정한 선안에서의 타협수단이 강구되기가 일쑤였다. 학원문제등 일부 민감한 문제에 대해 야당측이 독자적인 주요안을 구성한적은 있으나 조사결과가 나온적은 없었다.
이같이 정당들이 국회에서 국민을 대변하기 보다는 그들간에 실정된 관계에 지나치게 매임으로써 정치권역은 국회의사당 안으로 축소되고 장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지게 된것이라고 볼수 있다.
김영삼씨의 단식사건이 11대국회익 최초의 공전사태를 일으킨것도 제도권내 야당의 한계 때문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다급해진 야당의 공세로 지방자치제 실시시기를 87년으로 못박는 성과를거두긴 했으나 그때는 이미 11대국회에 대한 평가는 끝나버린뒤였으며, 여야의원 훈장수여 계획은 최종적으로 그 평가를 확인해준 사건이었다. 11대국회는 다당제와 함께 행태상으로도 겸직제도의 확대, 하오 국회개회등 새로운 실험을 해보았다.
이러한 발상은 이른바 직업적 정치인의 폐해를 없애고 국회의원을 명예직으로 해야한다는데서 비롯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배후에는 국회의 「용서」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깔려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나마 협소한 정치의 장에서 국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드러남에 따라 이같은 발상에 근거했던 실험들은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
겸직국회의원들의 전문성보다는 기업옹호 로비 등이 빚는 부작용이 더 컸다는 점은 여당측도 인정하는 것 같다. 정치의 아마추어화라는 시도가 오히려 전업정치인의 필요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수 있다.
다당제는 우리의 정치문화속에 뿌리내리기가 힘든 것으로 입증되고만것 같다.
특히 혁신계정당은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원내정당으로 생각하기는 힘든 것으로 나타났다.
11대국회 마지막 무렵 야당의 대여공세를 보면 야당측도 여당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의 선명야당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유권자들의 성향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것 같았다. 이런 판에 인위적인 다당제가 정착하기를 기대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였다고 봐야할것 같다.
11대국회의 축을 이뤘던 3당체제가 허무하게 무너진것은 어떻게 보면 국민을 의식하는원론적인 정치보다는 타의적인 정치기술에 더 익숙하게 젖어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여당당직자는 그런 속성을 보인 야당을 『그 시대에 필요한 역사적 역할을 다했읕뿐』이라고 냉철하게 분석했다.
11대국회가 새로운 국회상 정착시도라는 관점에서 평가될지, 한갓 과도국회로 평가되고 말는지는 속단할수 없으나 기본골격을 이뤘던 3당체제가 무너짐으로써 그 나름의 시대적역할도 끝났다고 봐야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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