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오라클 끼워팔기도 무혐의 … 공정위 계속되는 ‘헛발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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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공정거래위원회 공무원을 만났을 때 단 번에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 수 있는 단어가 있다. 위험한(?) 실험이지만 단 네 글자면 가능하다. 바로 ‘경제 검찰’이다. 공정위 직원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다. 고발 요청권을 둘러싼 두 기관의 갈등만이 이유가 아니다. 검찰이 갖는 ‘매서운’ 이미지가 함께 덧씌워지는 걸 불편해하는 공정위 인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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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정위는 문제 기업을 조사하고 심판정에 넘기는 역할과 1심 기능까지 갖춘 기관이다. 기업과 시장에 끼치는 영향력을 따진다면 ‘검찰+법원’의 막강한 힘을 가진 셈이다.

1년 조사하고도 ‘해당 없음’ 결론
라면 담합, SK 일감 등 잦은 패소
커진 칼에 걸맞은 예리함 갖춰야

재계 로비로 공정거래법 제정과 공정위 출범 자체가 무산됐던 1960~70년대가 아니다. 공정위는 필요 없다며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간부가 저녁 자리에서 술잔을 날리던 시절도,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가 공정거래법을 추진하려는 기획원 과장을 찾아가 책상을 치며 항의하던 때도 지났다. (공정위 편저 『공정거래위원회 20년사』)

그런 공정위가 자존심이 상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공정위는 전원회의를 통해 미국 오라클의 소프트웨어 ‘끼워팔기’ 의혹에 대해 13일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유선주 공정위 심판관리관은 “끼워팔기가 성립하려면 주된 상품과 거기에 얹어 파는 상품이 별개의 시장으로 구분돼야 한다”며 “오라클의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DBMS) 유지·보수 서비스와 해당 프로그램 업그레이드 상품은 DBMS 시스템 시장에서 따로 뗄 수 있는 독립된 상품으로 보기 어렵다”며 전원회의 결과를 전했다. 공정위는 오라클에 대한 조사를 지난해부터 해왔다. 결론만 쉽게 풀어 보자면 지난 1년간 하지 않아도 될 조사를 했다는 의미다.

공정위는 오라클 조사와 관련해 정보통신기술(ICT) 전담팀을 신설하는 등 1년 여에 걸쳐 의욕적으로 조사를 펼쳐왔다. 이번 결과로 ‘무리한 조사’ ‘무뎌진 칼날’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지난 1월 스테판 셀릭 미국 상무차관의 공정위 방문 건과 맞물려 ‘눈치보기’란 비난까지 가중됐다.

공정위 전원회의 문턱을 넘고도 대법원에서 막힌 일은 더 잦다. “담합 혐의로 라면회사에게 물린 1300억원 과징금을 돌려주라”는 대법원의 지난해 말 판결은 물론 올 들어 SK그룹 ‘일감 몰아주기’ 혐의에 대한 대법원의 347억원 과징금 납부 명령 취소 판결까지 사례는 첩첩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해 공정위는 소송에서 져 3572억4000만원에 달하는 과징금을 기업에 돌려줬다. 그해 거둬들인 과징금(3284억8500만원)보다 더 많은 액수다. 과징금 환급액은 2013년 302억6400만원, 2014년 2518억5000만원으로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과징금 부과 후 소송을 거쳐 다시 돌려주는 데 걸리는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무서운 증가 속도다.

공정위 내부에선 대법원 전관예우 문제를 탓하며 “조사 의지를 위축시킨다”며 비난하고 있지만 결국 기업·로펌과의 법정 다툼에서 밀릴 만큼 조사와 증거가 빈약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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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숙
경제부문 기자

공정위는 올해로 출범 35주년을 맞았다.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년기는 벌써 넘겼다. 경제기획원 산하 5개과로 미약한 출발이었지만 이제 공정위는 기업과 시장을 뒤흔들 힘을 가진 기관으로 컸다.

물론 위원장 사인 하나로 거액의 과징금을 매기고 기업이 순순히 처분을 따르는 시대도 끝났다. 과거보다 훨씬 커진 칼에 걸맞은 치밀한 조사, 엄격함이 공정위에 필요한 때다.

조현숙 경제부문 기자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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