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지질이 나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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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신간으로 구입하여 책장에 꼽아 둔 책이 2∼3년만 지나면 누렇게 색깔이 바래고 심하면 뒤틀리기까지 하는 것을 자주 겪게 된다. 내용이 아주 좋아서 아끼게 된다든지, 혹은 그 반대가 되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책 자체만을 볼 때 책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크게 줄어드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근본적으로 종이가 나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최근 출판계에서는 소비재로서의 책보다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현재 국내 서적은 많은 경우가 중질지를 사용하고 있고 노트지·백상지·아트지 등도 이용하고 있다. 중질지의 경우 그 질이 낮아서 쉽게 변색되거나 부풀고 인쇄 효과가 좋지 않은 등 질이 낮은 형편이다. 두께의 변화가 없고 기본 강도가 유지되어야 하며 불순물이 들어 있지 않아야 한다는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고 있다. 그보다 나은 노트지·백상지·아트지 등도 질이 높아져야 한다.
출판인 이기웅씨(열화당 사장)는 책의 지질이 높아지지 못하는 것은 제지 업계와 출판사 양쪽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이씨는 제지 업계의 경우 『보호 산업에 속해 있으면서 기술개발에 큰 힘을 쏟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각 회사가 각각의 전문성을 가지고 특정한 종이를 전문적으로 생산해 내는 제지 산업의 계열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종류의 종이를 생산해 냄으로써 질적 향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출판인으로서 어떤 종류의 책에 필요한 특수한 종이를 구하려 하여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강조했다.
출판 쪽의 영세성도 문제가 된다. 종이의 원가 부담 때문에 저급의 종이를 쓰고 있어 좋은 종이의 생산은 자연 어렵게 된다. 제지 업계에서는 『소량의 주문에 대비하여 시장 수요에 관계없이 생산해 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출판 디자이너 정병규씨는 『이 같은 사정 때문에 출판사는 종이의 선택 여지가 줄어들고 제지 업계는 다양한 생산을 못하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씨는 출판사들이 지질을 높여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일정 지질에 대한 요구를 제지 업계에 제기함과 동시에 제지 업계가 그만한 생산을 해낼 수 있게 하기 위해 단체 주문 등의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금성사 등 큰 출판사가 대량 주문에 의해 높은 지질의 종이를 이용할 수 있게 된 예를 들었다.
정씨는 종이에 대한 인식의 제고를 강조했다. 우리 문화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또 국제적으로 우리 문화의 얼굴이 되는 책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지질의 향상은 꼭 있어야 한다는 것.
지질의 향상은 소비자에게는 다소의 부담을 안겨 준다. 책의 원가 중 종이가 차지하는 부분은 15∼3O%가 되며 지질를 높일 경우 종이 값의 2O%정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책값은 5%내외의 인상 요인이 생긴다. 그러나 보존성과 시각 효과가 높아진다는 점은 높은 가격에 대해 보상이 될 것이다.
책의 보존 문제도 중요하다. 정씨는 『2천년대 중반이 되면 지금 나오는 책은 모두 없어지고 만다고 우려하는 도서관 관계자들의 말을 듣고 있다』면서 그것은 우리의 종이가 대부분 질이 낮은 산성 종이여서 부식돼 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외국의 경우 오래 보존해도 쉽게 변하지 않는 중성지로의 전환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중성지 개발을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임재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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