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당체체로 회귀하는 정계|예상외로 빠르고 거센 야권통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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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야권이 급속하게 신민당으로 통합돼 가고있어 정계가 11대국회이전의 양당체제로 되돌아 가는추세를 보이고 있다. 당선자들의 대거이탈 움직임으로 원내교섭단체구성이 불가능해진 민한당이 무조건 합당을 제의하기에 이르렀고, 국민당 역시 2일 2명의 당선자가 신민입당을 선언함으로써 이탈의 물꼬가 터졌다.
양당체제로의 회귀추세는 선거후 예상돼온 일이지만 그 흐름이 짧은 기간에 이처럼 빠르고거세게 일어날줄은 예상못한 일이며, 앞으로의 정계판도가 주목의 대상이 아닐수 없다. 또 이같은 야권통합의 급속한 흐름은 신민당의 기세를 높이고 두김씨의 영향력 과시를 가져옴으로써 대여수위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는지도 알수 없는 일이다.
이번 흐름의 기폭제가 된것은 민한당전당대회의 결과다.
통합신중론자인 조윤형씨가 총재로 당선되자 민한당의 개별이탈이 급격하게 나타나고, 더 이상 대항할수 없게된 조총재는 체제정비의 구심력을 상실하고 사실상 백기를 들고 말았다.
조총재는 『질서있게 예우를 받으며 당대 당의 협상과정에서 정정당당하게 임해야한다』 고 신중한통합방법론을 제시했으나 두김씨의 원심력에 흡인되는 대다수 당선자들의 이탈움직임에 속수무책이었다.
허경구·목요상·이영준씨등 재선의원그룹은 물론이고 1일낮 회동해 「4·1동지회」를 결성한 유한열·황낙주·정재원·황병우·서종렬·김일윤·최운지·이건일씨등 범주류까지도 결행의 기미를 보였다. 조총재는 특히 범주류의 이같은 움직임에 결정적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들 외에도 수권위파와 행동을 같이한 김정길씨와 전국구의 이태구·박해충·정상구·신재휴·송현섭씨등도 대세에 합류할 뜻을 굳힌 것으로 알려져 조총재는 사면초가에 빠진 셈이다. 자신의 「질서있게 예우받는」통합추진론이 발붙일 바탕을 잃어버린 상황이 됐다.
이같은 상황의 급전에 따라 조총재는 1일하오 참모장격인 정대철씨에게 전권을 위임, 김대중·김영삼씨에게 차례로 보내 『당대당의 통합형식만 취해준다면 국회개원전까지 무조건 통합에 응할 터이니 그때까지만 이라도 개별 이탈이 없도록 협조해달라』고 백기를 들었다.
이에 대해 김대중씨는 『통합은빠른것이 상책』이라며 조총재의 결심강도를 재차 확인한후 『이중재씨를 만나 타협점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김대중씨는 이씨를 만나 『조총재가 저렇게 나오는데 받아들일수 있지 않느냐』고 권유했다고한다.
김영삼씨는 정대철씨로부터 조총재의 의중을 전달받고 깜짝놀라며 『정말이냐』고 수차 묻고는『그렇다면 좀 기다려볼수도 있지않느냐』고 말해 김대중씨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정씨는 해석했다.
그러나 정씨보다 뒤늦게 김씨를 만난 유한열씨는 『김영삼씨는 합당은 빠를 수록 좋고, 빨리 통합을 이루는 길은 탈당에 의한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 종래입장이 바뀌지 않았더라고 말했고 그말이 김씨의 내심임이 확인됐다.
사태가 이같이 급전직하한데는 몇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2·12총선후 김영삼씨가 당대당의 합당은 과거의 예로 보아 불가능하다고 판단, 영향권내의 민한당당선자들이게 국회개원전 개별이탈을 적극적으로 종용한것이 큰원인의 하나다.
초기에 김대중씨는 모양을 갖춘 정식합당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해 김영삼씨와 통합방법론에 이견을 보였지만 두김씨의 3월15일 회동에서 수권위안의 통합방법론으로 일단 타협점을 찾았다. 이에따라 동교동영향권의 이중재씨등이 두김씨의 수권위안을 받아들여 전당대회에서 밀고나갔지만 표대결결과 수권위안이 가장 낮은 지지율로 부결되자 그 자리에서 수권위파들은 개별이탈방법밖에 없다는 결심을하게됐다.
그러나 조총재는 30일 두김씨를 차례로 방문, 당대당익 질서있는 합당때까지 개별이탈방지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하는 이탈방지노력을 폈지만 김영삼씨로 부터는 거의 냉대를 받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조총재는 당직인선안을 갖고 당선자들과 접촉, 이탈방지에 안간힘을 폈다.
이때까지만해도 조총재는 원내교섭단체의구성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요일인 31일 이중재씨가 수권위안에 서명치 않았던 허경구씨등과 접촉을 갖고 뜻을같이 하기로 재다짐했으며, 김영삼씨는 황낙주·유한열·이중재씨등 10여명이상을 자택으로 불러 개별이탈을 재차 강도높게 권유함으로써 당선자들의 대세는 개별이탈방향으로 흐르기시작했다. 동교동측도 1일낮까지는 개별이탈 촉진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구체적 모습이 1일낮 범주류의 「4·1동지회」결성으로 드러났다. 유한열씨등 8명이 행동통일을 하기로 했는데 민한당에 더이상 머물러 당대당통합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는데 결론을내린 것으로 앝려졌다.
1일낮 대세가 기우는것을 알아챈 조총재는 당선자들의 동향을 탐문, 범주류의 이탈조짐까지확인되자 자신의 힘에 한계가 있음을 비로소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날하오 조총재는 대세에 밀려 무조건합당에 응할터이니 당대당이라는 체면만 갖춰달라고 항서를 쓰기에 이른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김영삼씨측이 받아들이지 않고 조속한 통합을 다그치는 바람에 당초 오는 l5일한 무조건 통합을 내걸었던 조총재는 2일 수권위파가 제시한「8일한 통합」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를 보여 두당의 통합은 이미 눈앞에 온 형국이 됐다.<이수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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