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축소판「미국속의 한국」…LA코리아타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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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세계로 진출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곳」하면 곧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연상할이 만큼 LA의 한인타운은 집약된 한국이민사이자 화제와 문제도 그만큼 많은곳이다.
서울의 어느 번화가에 와있는듯한 착각을 일으킬만큼 한글간판들이 즐비한 올림픽가는 70년대초 한국인들이 대거 진출하기전까지만해도 흑인들과 중남미이민들로 가득찬 빈민가였다.
LA시당국에서도 정비에손을 대지 못하던 이 지역에서 한국인들은 미국의 서부시대 못지않는 개척정신을 발휘, 인근 제퍼슨가·크렌셔가·비벌리가등에 육박하는 「번영의 길」로 키워나가고있다.
5km에 달하는 한국인거리에는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할줄 모르는 사람들도 아무런 불편없이 세상만사를 해결할수 있을 정도여서 문자 그대로 「미국속의 한국」임을 실감케한다.
줄잡아 2천여개소로 집계되고있는 한국인업소는 종류 또한 그 업소수만큼이나 많아 식료품·식당·가구·서적·자동차·주유소등 일상생활 주변품목에서부터 헬스클럽·여행사·병원·변호사·부동산업·무역회사등과 그리고 심지어는 운명감정·결혼상담·장의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이밖에도 교회와 사찰등 종교기관이 약 7백여개나 되고 교포신문사, 서울에 본사를둔 신문·방송지사가 30여개, 최근에는 교포자본을 주축으로 설립된 은행까지 개설됐다.
1905년경에 시작된 한국인 이민은 인근 제퍼슨가가 시발점이었으나 70년대초 한국인들이 무더기로 밀려들면서 중심지가 올림픽가로 바뀌어 당시 이희덕씨라는 교포가 「올림픽마킷」이라는 한글간판을 처음 내걸어 그 주변에 교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요즘은 한인교민들의 생업·활동무대가 점점 넓어져 인근3∼4개 번화가로 진출한것은 물론 약간 떨어져있는 할리우드가, 오린지카운티지역, 가든글로브까지 확대되고 있다.
소수민족의 미국이민형태가 서로 비슷하듯이 한국인들도 처음에는 막노동품팔이로 이민생활을 시작, 너나할것없이 부부가 맞벌이로 약간의 돈을 드는게되면 사본이 비교적 적게 드는 세탁소·식료잡화·햄버거가게·야채가게·주유소로 늘려나갔다.
70년대 이미자들만해도 거액의 이민정착금반출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전직에 관계없이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이 과정을 거쳐 정착했다.
최근 10여년동안 해마다 증가한 이민자수는 LA의 한인사회에만 「30만교민」을 헤아리게 됐다.
그러나 양적인 팽창이 있었던 이변에는 그에 못지않은 문제들도 있다.
올림픽가에 들어선 한인교포들이 종합계획없이 뿔뿔이 개별적으로 자리를 잡는 바람에 전체적인 거리의 현모가 우선 안정되기 못했고 한인타운이라는 특성도 살리지못한것이 가장 큰 결점이다.
일본교민지역사회인 리틀도오꾜나 중국인존인 차이냐타운등과 같이 아시아지역에서 건너간 인근국 교민들은 각자 그들 나름대로 민족문화의 전통을 지역사회속에 심는데 주력했다.
이때문에 다른 외국인들은 리틀도오꾜나 차이나타운에서 일본·중국의 독특한 인상을 쉽게 받지만 코리아타운은 아직 그런 점에서 뒤떨어져 있다.
한인사회는 교민들의 참여의식과 본국정부와 지원강도가 함께 부족하다는것이 낙후성의 원인으로 꼽힌다.
짜임새 없는 한인사회는 결국 외국인 고객유치도 저조해 자본유통이 한국이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등 발전제약요소가 되고있다.
각종 흉악범죄는 한인사회의 또다른 암적 존재다.
한인사희가 흑인이나 중남미계 우범자들의 표적이 된것은 이민초기때부터.
한인사회를 그들은 『노다지가 있는 금광』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대개 고급차를 타거나 쓸데없이 거액의 현금이나 귀금속을 지니고 다니기 때문.
더구나 미국법정에서는 피해자의 증언이 있어야 범법사에게 유죄판결을 내릴수있는데 한인들이 이를 제대로 따르려 하지않아 한인사회가 「우범자들의 온상」처럼 여겨지고 있는것이다.
타민족에 비해 가장 늦게 미국이민을 시작했으면서도 가장 빠른 시일에 정착에 성공한 한인사회의 앞날은 이처럼 「서로의 단결과 본국에서의 적극적인 지원」, 그리고 「한인사회를 위협하는 범죄를 어떻게 뿌리뽑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끝> 【로스앤젤레스=김정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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