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신 위배에 앞장선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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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회가 KBS사장으로 임명된 민정당전국구출신 박현태의원의 사퇴서를 처리하는 과정은 지극히 교묘했다.
전국구의원이 사퇴하면 같은 정당의 예비후보가 의석을 승계하게 돼있는데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전국구의원의 사표를 수리하게 되면 의원직승계로 1개월, 또는 2개월짜리 국회의원이 생겨 웃음거리가 될판이고 승계를 안 시키자니 법을 어기는 사태가 생겨 고심이 많았던게 사실이다.
이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이번 박의원의 경우 묘안이 등장한 것이다.
의원직 사퇴서가 제출되면 국회는 대통령과 중앙선관위에 15일 안에 통고를 해야하는데, 고의로 이 통고를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으로 늦춰 사실상 후임자의 승계를 봉쇄키로 한 것.
11대의원의 임기가 4월10일로 끝나는 만큼 20일에 제출된 박의원 사표를 20일부터 15일이 지난 4월4일께 중앙선관위에 통고하면 선관위는 선관위대로 법으로 허용된 10일간의 승계자 결정기간을 다시 최대한 활용해 서류처리를 지체하다가 임기만료와 동시에 사장시켜 버린다는 입법부와 행정부의 「공동작품」을 고안해 낸것이다.
임기를 불과 한달도 안 남겨놓고 의원선서도 못할 승계의원을 또 만들어 낸다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차원에서 이같은 처리방법이 어느 면에선 합리적이란 얘기를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법을 존엄시하고 준수해야될 국회가 스스로 법정신(법중에서도 국회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될 국회법)을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국회의 변법적운영은 지난번 오제도의원의 사퇴서 처리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작년말 민정당전국구출신인 오의원이 무소속 출마를 위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을 때 국회는 뚜렷한 명분없이 이를 반려했고 이후 오의원이 계속 사퇴서를 제출했지만 처리를 하지 않고 묵살했던 것이다. 오의원의 사퇴를 그때 허가치 않은 것도 그가 사퇴할 경우 생기는 의원승계문제 때문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의원승계자인 이진 정무장관 보좌관이 민정당의 12대 전국구 예비후보 1번이기 때문에 의원배지를 붙였다, 떼었다하는 번거로움을 피해보자는 비합법적인 이유에서 기된 것이었다.
아예 법에 임기만료 한달이면 한달, 두달이면 두달 이내에는 전국구의원을 승계시키지 않을 수 있다고 길을 열어두든지, 아니면 법대로 운영을 하든지 해야할 것이다.
국회가 스스로 법을 준수하지 않으면서 행정부가 법치행정의 궤도를 이탈할 때 어떻게 이를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겠는가.
이번 처리과정이 명백한 법률위반은 아니다. 그러나 조문상의 미비점을 원용하여 본문보다는 단서,원칙보다는 예외조항을 변법으로 활용하려는 발상자체를 12대 국회에서부터라도 자제해야 될것 같다. <고흥길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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