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평생을 바친 산증인|타계한 김용식씨 축구인생 7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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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스포츠의 큰 별이 떨어졌다. 김용식씨-. 그는 오로지 축구에 평생을 마친 한국축구의 대부이며 산증인이었다.
1910년 황해도 신천태생인 김용식씨는 10살 때인 국민학교(신천경신국교)3학년부터 공을 차기 시작, 한평생을 축구의 외길을 걸어왔다.
개화초기 장로교 부흥목사로서 전국에 걸쳐 명성을 날리던 김익두 목사의 3남1녀 중 막내인 김씨는 12살 때 서울로 이사, 미국유학후 목사가 되라는 부친의 권유를 뿌리치고 축구에만 미치다시피 했다.
경신중에 들어간 김씨는 이미 축구신동으로 장안의 유명학생이 되었고 보성과 숭실전문을 오가며 국내 축구계의 큰 별로 떠올랐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일본은 민족차별정책에 따라 당시 일본선수들을 월등히 능가하던 한인선수들을 대표선수로 기용하는 것을 한사코 외면했으나 유일하게 김씨만은 빼놓을 수 없었다.
해방 이후 선수생활을 계속하면서 지도자로서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김씨는 73년 신탁은행 감독직을 물러날 때까지 축구계에 헌신했다.
80년 말 국내 첫 프로팀인 할렐루야가 창설되면서 감독을 맡아 축구에 대한 식을 줄 모르는 정열을 보였고 83년 초 비로소 축구일선을 떠났다.
김씨는 2년 전 병상에 눕기까지 매일(실로 46년동안 한번도 빠짐없이)축구공과 뒹구는 새벽운동을 계속, 초인적인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가 온몸으로 축구공을 다루는 곡예와 신기는 이미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이방면에선 세계적으로 따를 자가 없다는 평판을 받았다.
김씨는 74년 부인과 사별했으며 슬하에 딸만 다섯을 두었다. <박군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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