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오근 사회부차장|청산가리를 밀가루로 알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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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도 모르는 일인데다 경찰이 수사를 하고있는 사릴도 없는데 왜 이런 기사가 중앙일보에만 났느냐』
23일 하오 중앙일보 1판신문이 배달된 직후 사회면 머리로 실린 「해태제과에 청산가리가 우송됐다」는 기사와 관련, 치안본부의 수사실무책임자인 백형조 경무관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호통을 치며 항의했다.
거의 비슷한 시간의 서울시경에서도 담당수사책임자인 우기호형사과장은 『그런일이 절대로 없다』고 청산가리우송사실을 잡아떼고 있었다. 우과장은 이날하오2시30분쯤에야 『지금 막 이관할 영등포경찰서로부터 보고가 왔는데 「밀가루」로 보이는 분말이 담긴 봉지가 우송돼왔다』고 뒤늦게 시인을 했다
해태제과에 청산가리가 우송돼온 것은 이날부터 닷새전인 지난 18일. 신고를 받은 영등포경찰서가 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감정의뢰한 것은 그 이튿날인 19일이었다.
감정의뢰 날짜로부터 따져도 나흘이나 지난 시점이었는데도 치안본부와 서울시경에서는 23일 이런일이 아무렇지도 낳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것도 아닌 청산가리였다. 사람이 먹으면 즉사해버리는 극약이었다.
때문에 이같은 사실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의 책임을 맡고있는 경찰이 어느 누구보다 먼저 널리 알려 주의를 환기시켰어야할 일이었다.
경찰은 후에 청산가리와 밀가루가 다같이 흰색이기 때문에 식별이 곤란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한 그흰색분말 한봉지를 놓고 사람을 죽이는 청산가리인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밀가루인지를 나흘이 지나도록 구별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왜 사실을 숨기려 하는가. 경찰의 눈에는 왜 청산가리가 나흘동안이나 계속 밀가루로 보이는가.
치안본부와 시경의 간부가 주장한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이것은 이것대로 더욱 큰문제가 아닐수 없다.
온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한 어처구니없는 범죄를 놓고 식품회사는 나름대로 일부제품의 생산을 중단하는등 처절한 몸부림을 하고 있고, 그회사에 생계를 건 종업원과 그 가족은 물론 온국민이 숨을 죽여가며 추이를 지켜보고있는데 다른 부서도 아닌 협박사건수사의 지휘부서가 「청산가리 첫등장」을 닷새가지나도록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지 설명될수없기 때문이다.
우리경찰의 수사체제가 그처럼 한심스럽게는 보여지지는 않는다.
이제는 우리경찰도 성숙된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알릴 것은 그때 그때 알려야하고 시민의 협조도 받을 것은 받아야한다. 협박범 신길현씨도 바로 공개수사→시민 제보로 검거되지 않았던가.
그 신씨 한명을 검거한 뒤 나머지 협박사건을 단순모방범죄로 단정, 수사본부를 해체한것도 경솔한 짓이었다.
신씨검거후에도 협박편지는 30여통이나 날아들었고 급기야 청산가리까지 등장한 사실이 이를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우연일지는 모르지만 협박사건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최근 경찰 내부에서는 도경국장과 경찰서장의 인사이동을 앞둔 술렁임이 가득하다
청산가리등장후의 일련의 움직임이 혹시 「감점 요인으로 작용할것」을 우려한 나머지 모두들 콩밥에만 신경을 쓰다 일어난 사태가 아니었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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