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1)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6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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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앞 회에서 경찰당국이 1937년 6월 수양동지회사건을 꾸며 도산 안창활이하 1백50명을 검거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때 검거되었던 도산은 병보석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1938년 3월10일 별세하였다. 경찰은 무슨일이 있을까봐 경계를 엄중히 하고 아무도 접근시키지 않아 쓸쓸한 장의를 치르게 하였다.
나는 젊어서 도산의 연설을 꼭 한번들은 일이 있으므로 그때의 인상을 적어보려고 한다.
도산의 연표를 보면 도산이 대전감옥에서 가출옥으로 나온 것이1935년 2월이었고, 또다시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된 것이 1937년 ,6월이었으니 아마 1935년이 아니었으면 그 이듬해인 1936년 10월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때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활발해 1933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해 오늘날 우리들이 쓰는 한글을 만들었고, 세종대왕이 정음을 발표하신 9월29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10월28일을 한글날로 제정했고, 다시 표준어를 사정하는 일을 시작해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던중 10월28일의 한글날을 맞이해 그 축하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시간은 6시이고 장소는 명월관 이었다. 나는 표준어 사정위원 이었으므로 그 축하식에 초청되었다.
개회시간이 늦어지자 주최자 측에서 나와 오늘 축하 석에 도산 안창호가 출석하기로 되었는데 임석하는 경찰관이 늦어서 조금 늦어진다고 양해를 구했다.
도산이 출석한다는 말을 듣고 모무들 웅성거렸다. 그때 참석한사람이 큰방 둘을 트고 꽉 차게 앉았으니까 60∼70명은 되었을 것이다.
도산이라면 그당시 우리민족의 큰별 이었다. 도산보다 앞서서 몽양 여운형이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서울로 호송 되어왔는데, 그때 몽양은 지금 중앙청 건너편에 있는 경기도 경찰부로 들어가게 되어 구경의 자동차가 경기도청 앞에 도착하자 운동선수 같이 쾌활하게 자동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사진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여 그 늠름한 자태가 당당하더라고 신문기자 사이에 떠들썩했다.
출옥한 뒤에도 그는 당당한 풍채로 서울시내를 활보하여 일찌기 동경 제국호텔에서 일본과 세계각국의 신문기자들 앞에서 한국독립을 역설하는 웅변을 토하던 독립투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도산이 상해에서 검거되어 올 때에는 일경의 경계가 엄중하여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였고 대전감옥에서 나와 서울에 올라온뒤에도 친척이나 측근자 이외에는 아무도 접근할수 없었다.
삼각동 중앙호텔에 묶고 있을 때에는 날마다 많은 친지들이 면회하였다고 하지만 일일이 일경의 체크를 받아야 하므로 마음놓고 드나들지 못하였다. 이렇게 일경의 경계가 엄중하므로 민중 앞에 얼굴을 보이고 공중회합 같은데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한글날 축하식에 출석한다니 놀라움이 아닐수 없었다. 우리들은 도산을 면접하는 기대에 가슴을 울렁거리면서 긴장된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어학회간부의 인도를 받으면서 도산이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들은 일제히 일어나 공손하게 경례하였다. 키는 중키, 살찌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은 보통체격이고, 얼굴빛은 누렇고 횐 편이며, 이마는 벗겨졌고 안경을 썼는데, 언뜻 느껴지는 인상이 범할수 없는 위엄을 가진 인자한 성자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는 겸손한 자세로 조용히 보료위에 앉았고, 멀리 떨어져 삼륜이라고하는 종로서 고등계 주임이 매서운 눈초리로 주의를 흘겨보면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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