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인사이드] “이웃집 여성에게 ‘음란쪽지’ 보낸 남성, 성범죄로 처벌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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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현관문에 음란한 내용의 쪽지를 수차례 끼워넣은 행위를 성범죄로 판단해 처벌할 수 있을까요.

법원은 어렵다고 했습니다. 피해 여성의 집에 편지(쪽지)를 직접 끼워놓은 것이라 현행법으로 처벌 가능한 행위가 아니라는 취지죠. 관련 법 조항을 엄격하게 해석한 판결이지만 성범죄 처벌 기준에 대한 형평성 논란이 일 것으로 보입니다.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상 통신매체 이용 음란 혐의로 기소된 이모(47)씨에게 징역 6월,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 명령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고 20일 밝혔습니다.

경북 문경의 한 원룸에 살던 이씨는 2013년 11∼12월 옆방 여성의 출입문에 유사성행위를 하고 싶다는 문장과 성기 그림 등을 그린 쪽지를 6차례 끼워 넣은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1심은 징역 1년에 40시간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2심은 이씨의 형량을 징역 6개월로 줄였지만 역시 실형을 선고했습다. 2심은 이씨가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형량을 징역 6개월로 줄인 것입니다. 두 재판에서는 이씨의 행위가 명백한 범죄여서 처벌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사건을 2심 재판부에 돌려보냈습니다. 이씨의 행위가 죄가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성폭력처벌법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성폭력처벌법을 "전화ㆍ우편ㆍ컴퓨터나 그 밖에 일반적으로 통신매체라고 인식되는 수단으로 성적 수치심 등을 일으키는 말ㆍ글ㆍ물건 등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행위를 처벌코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씨가 위와 같은 통신매체를 통해 편지(쪽지)를 도달케 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성폭력처벌법 제13조에 의하여 처벌할 수는 없다”는 판단입니다. 우편으로 편지를 배달하는 경우는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죄를 적용할 수 있지만 이씨처럼 편지를 ‘직접’ 전달하는 경우는 처벌조항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법원 관계자는 “죄형법정주의(법률로 규정된 행동에 대해서만 범죄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것) 원칙상 처벌하기 어렵다는 취지”라며 “형법학계에서도 일부 비판이 있는데 입법적 개선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장혁진 기자 analo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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