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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자산업의 별이었던 샤프, '기술의 함정'에 빠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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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했던 줄다리기가 끝났다. 승자는 궈타이밍(郭台銘·66) 훙하이(鴻海)그룹 회장으로 굳어지고 있다. 궈 회장이 샤프 인수전에서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민관펀드 일본산업혁신기구(INCJ)를 '머니 게임'에서 제치는 분위기다.

25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샤프 이사회가 궈타이밍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고 보도했다. 104년 역사를 지닌 샤프의 주인이 바뀐다는 소식에 주식 시장은 널을 뛰었다. 샤프 주가는 이날 일본 증시에서 장중 한때 전날보다 5.1%나 올랐다. 하지만 샤프가 훙하이그룹 인수보도에 묵묵부답하자 주가는 오히려 14%나 빠진 주당 149엔으로 마감했다. 샤프 측이 계약 체결 여부를 공식 발표하지 않자 시장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궈 회장은 지난달 초 6600억엔(약 7조3000억원)에 달하는 인수대금을 제시하며 승부수를 띄웠다. 경쟁자인 일본 민관펀드(산업혁신기구·INCJ)가 제시한 금액의 2배에 달하는 액수였다. 이사회는 고심에 빠졌다. 일본 정부가 "산업 생태계 붕괴"를 앞세워 반대했다.

샤프 인수가 난항을 보이자 지난 4일 궈 회장은 샤프를 찾았다. "90% 설득 작업이 끝났다.이달 말까지 인수절차를 마무리하겠다"고 발표했다. "40세 이하의 직원은 자르지 않겠다. 회사도 분할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24일 샤프의 임시 이사회가 열렸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13명의 이사진 사이엔 팽팽한 의견대립이 있었다. 대만 기업의 첫 일본 회사 인수인 데다, 샤프가 일본 내에서 차지하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25일에 다시 열린 이사회에서 이사들은 국가 기반 산업이란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다. 궈 회장은 웃었다. 홍하이정밀 주가는 전날보다 2.6% 올랐다. 그가 최대주주(12.62%)로 있는 훙하이정밀은 애플과 밀월관계에 있다. 훙하이정밀의 자회사인 폭스콘을 통해 애플의 아이폰을 만든다. 세계 최대의 '공장'으로 불릴 정도로 폭스콘은 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OEM)에선 업계 최고 위치에 올라있다.

대만 최대 부호인 궈 회장이 샤프를 눈여겨 보게 된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애플 때문이다. 블룸버그 분석에 따르면 훙하이정밀 매출의 50%는 아이폰과 아이패드에서 나왔다.애플의 아이폰이 많이 팔릴수록 궈 회장의 지갑은 두터워졌다. 훙하이 정밀의 매출(2015년 11월 기준)은 2009년 대비 123%나 뛰었다. 궈 회장은 스마트폰 시장이 성숙해지면서 아이폰 판매가 쪼그러들 기세를 보이자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액정디스플레이(LCD)에 이어 스마트폰과 로봇·TV·백색가전까지 갖고 있는 샤프는 최상의 매물이었다. 일본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샤프의 주채권은행인 미즈호은행과 미쯔비시도쿄 UFJ은행을 직접 찾아가 설득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궈 회장이 샤프 인수가 확정되면 디스플레이란 부품을 갖게 된다. '이름(브랜드) 없는 회사'에서도 벗어나는 기회도 잡는다. 샤프란 브랜드로 세계 전자제품 시장에도 직접 뛰어들 수 있게 돼서다.

샤프가 어떤 회사인가. 일본의 전자제품 역사를 쓴 기술기업이다. 한 때 세계 전자산업을 쥐락펴락한 별이었다. 이런 기업을 인수하면 단번에 전자업계의 총아로 올라설 수 있다.

샤프의 시작은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샤프는 초등학교 2학년을 채 못다닌 창업주 하야가와 도쿠지(早川德次)의 손에서 태어났다. 8세부터 금속 장인 밑에서 일하던 하야가와는 구멍없이 조일 수 있는 벨트 버클을 고안하면서 회사를 일으켰다. 창업 3년 만에 기계식 연필인 '샤프'를 만든 것도 그였다. 지금 관습적으로 지칭하는 '샤프펜'이 이때 태어났다.

관동대지진(1923년)으로 공장이 불타 사라지면서 샤프의 혁신은 위기를 맞았다. 하야가와는 당시 일본문구제조에 회사를 넘기고 오사카(大阪)에 다시 회사를 차렸다. 오사카 신사이바시 상점에서 사온 외산 라디오를 분해해 라디오 만들기에 도전했다. 일본에서도 곧 라디오 방송이 시작될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시장을 앞서 준비한 그의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일본 최초의 라디오는 해외에서까지 팔려나갔다. 태평양 전쟁으로 두번째 위기를 맞았지만 샤프는 기사회생했다. 1951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라디오 해외 수요가 늘어났다.

하야가와는 라디오에 이어 TV 방송 개시(1953년) 전에 TV를 만들어냈다. 일본의 첫 TV로 NHK가 시험방송을 했다. 컬러 TV(1960년)에 이어 세계 최초의 LCD TV(1987년)까지 주요 혁신은 샤프에서 나왔다.

샤프의 자존심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부터다. 브라운관 TV에서 LCD TV로 시장이 빠르게 옮겨가자 경쟁자였던 삼성과 LG가 대형 LCD생산에 돈을 쏟아부었다. 삼성전자는 직접 만든 LCD를 기반으로 보르도 TV를 만들었고 2006년 소니와 샤프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TV 시장이 완전히 LCD TV로 넘어오자 위기가 찾아왔다. 상대적으로 중·소형 LCD에 집중했던 샤프에 타격을 입었다. 일본 정부가 디지털 TV 구입에 주던 보조금을 끊자 샤프의 일본 내 매출은 4분의 1 토막이 났다.

일본 정부는 시장 침체로 위기를 맞은 LCD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2012년 4월 재팬디스플레이(JDI)를 세웠다. 도시바·히타치·소니의 중소형 LCD사업을 묶었다.샤프에도 합류를 제안했다. 샤프는 거절했다. 독자생존을 선언했다. 하지만 삼성·LG 등 경쟁업체를 따라잡지 못했다. 적자는 계속됐다. 블룸버그가 추산한 지난해 영업손실액은 1284억엔. 적자를 견디지 못한 샤프는 지난해 해외TV사업 철수와 90년 넘은 본사 사옥 매각, 직원 3500명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업계는 샤프의 몰락을 '기술의 함정'으로 풀이했다. '원조'라는 자신감이 시장 상황을 읽는 눈을 가렸다는 것이다. 일본 LCD 회사들이 뭉친 재팬디스플레이 설립 당시에도 샤프는 기술을 과신하고 버텼다. 안방 TV 시장 1위라는 타이틀에 취해 경영진이 시황을 읽지 못한 것이 패착이라는 분석이다.

한때 세계 TV 시장을 장악했던 소니가 TV사업을 분사시키고, 파나소닉은 PDP TV 사업을 접는데도 샤프만 위기상황을 인식하지 못했다. 궈 회장에 맞서 샤프의 구원투수로 나섰던 INCJ가 이사진 3명의 해임을 요구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였다. 미즈시마 시게아키(60) 회장과 다카하시 고조(61) 최고영영자(CEO), 재무 총괄자인 오니시 테츠오(61)를 해고해야 자금지원을 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경영진을 물갈이하고 주채권 은행의 금융지원(3500억엔), LCD 사업의 분사와 도시바와의 가전사업 합병안을 내세운 데엔 디스플레이 사업의 독자생존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샤프의 대변화를 바라보는 전자업계의 시선은 평온하지 않다. 세계 TV 시장은 포화 상태다. 그 전방 사업인 디스플레이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 본토에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데다 애플을 등에 업은 궈 회장의 행보에 따라 시장 상황이 돌변할 수 있어서다.

이미 애플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궈 회장은 샤프 인수로 디스플레이의 안정적인 공급원을 확보해 디스플레이 사업을 정상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샤프는 세계 중소형 디스플레이 시장 4위(10.2%) 로 지난해 기준 삼성디스플레이(1위·26.4%)와 재팬디스플레이(2위·13.9%), LG디스플레이(3위·16.7%)를 추격하고 있다.

디스플레이 사업의 변수는 과감한 투자다. 생산라인을 하나 짓는데에 수조원이 들기 때문이다. 샤프는 이런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경쟁에서 밀렸다. 하지만 앞으로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궈 회장의 추가 자금 지원에 따라 업계 순위가 요동칠 수 있어서다. 야스다 히데키 에이스리서치 연구원은 "사업재편 속도로 가늠하면 폭스콘의 제안이 더 매력적"이라며 "(샤프) 인수가 마무리 되는대로 궈 회장이 대규모 투자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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