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34년간 받은 군인연금 모두 장학금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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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렇게 값진 일을 할 수 있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조국이 주는 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생각에 한푼도 쓰지 않고 꼬박 모았습니다."

34년 동안 모은 군인연금 6천만원을 재향군인회에 장학금으로 내놓은 김명희(金明姬.78)예비역 육군대령. 金씨는 4일 서울 잠실 향군회관에서 열린 장학금 전달식에서 "이제야 조국에 빚을 갚은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金씨는 여군간호장교 출신. 1948년 간호장교 2기생으로 육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에도 참전했고, 제11대 육군 간호병과장을 지내는 등 21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69년 전역했다.

72년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어렵게 살았지만 연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언젠가 '낳아주고 길러준' 조국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한국에서의 간호사 경력을 인정해 주지 않아 마흔일곱살이 돼서야 간호사 자격증을 따냈습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대한민국 육군간호장교 출신'이란 자부심을 잃지 않았죠."

金씨는 동료 간호사들이 질투를 느낄 정도로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고, 보통 4년 걸리는 승급 시험을 2년 만에 통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81년 간호사 생활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한 환자가 떠미는 바람에 쓰러졌고, 그때 허리를 다쳤다. 현재 그가 받고 있는 군인연금은 월 1백60만원. 전역 직후에는 월 3만9천원 수준이었다고 한다. 독신인 그는 병원 측으로부터 받는 연금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평북 신의주 출신인 金씨는 이산가족이다. 열네살 때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산파학교를 졸업한 뒤 47년 귀국했다. 내과 원장이던 외삼촌이 사는 서울에 정착해 간호장교로 입대한 것.

金씨는 "부모님은 이미 신의주에서 돌아가셨겠지만 일본으로 유학갔을 때 젖먹이였던 남동생 명찬이와 명호는 살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향군 측은 金씨로부터 받은 장학금을 매년 6.25행사를 전후해 참전용사 직계 후손들에게 장학금으로 줄 예정이다. 미국 동부지역 재향군인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金씨는 "살아 있는 동안 받게 될 연금도 모두 모아 장학금으로 내겠다"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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