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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밑거름 '문고판' 살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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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올 41세인 시인이자 소설가 장정일의 '삼중당 문고'라는 제목의 시는 "열다섯 살/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라고 시작한다. 당시 우리 지식사회의 단면을 잘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요즘 들어 한국 출판시장에서 문고판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가난한 지식인들에게 의미있는 책을 싼 가격에 어떻게 공급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 일부에선 문고판 시장 활성화가 'IMF보다 더한 불황'이라는 요즘 출판계에 새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출판사는 수익 구조를 개선하고, 독자는 싼 값에 책을 사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최근 살림 출판사에서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국내 필진이 쓴 문고판 '살림 지식총서'를 출간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초부터 출판사 책세상은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책세상문고 우리시대''고전의 세계' 등을 꾸준히 내고 있다.

이제이북스라는 신생출판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 심리학 주제만을 다룬 '사이코 북스'를 출간하고 있다. 또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시공사)'한길로로로'(한길사)'하룻밤의 지식여행'(김영사) 등 현재 유통되고 있는 문고판은 30여종이 넘는다.

출판평론가 이권우씨는 "미국.일본의 경우 하드커버로 나와 1차로 소화되고, 그 다음 저렴한 가격으로 양서를 보급한다는 취지에서 출판사에서 페이퍼백으로 책꼴을 바꿔 다시 출간한다"며 "그러나 우리는 문고판을 위해 새로 번역하고 저작권을 계약하니 문고판으로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경우 1년간 문고판 신간 종수는 6천1백55종, 판매 부수는 2억1천9백91만부에 달한다. 전체 도서시장에서 문고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판매부수의 29.8%, 매출액의 13.6%다. 그러나 우리 시장에서 문고판의 비중은 통계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다.

출판연구소 백원근 차장은 "1970년대 문고판 전성기를 지나 80년대부터 외양을 중시하는 풍토가 자리잡으며 이제는 값싸게 우량 콘텐츠를 보급하겠다는 출판 철학이 부재하게 됐다"고 말했다.

문고판을 교양.고전 분야로만 국한하고 있는 것도 활성화를 막는 요인이다. 일본의 경우 실용서도 문고판으로 나오고, 베스트셀러로 인기 높았던 '로마인 이야기'도 지난해 문고판으로 출간됐다. 백차장은 "출판 시장의 미래에 대한 투자로 여기고 출판사.유통업체들은 문고판 보급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장정일의 '삼중당 문고'로 돌아가보자.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아무래도 문고판 시장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을 듯하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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