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인사이드] 주먹으로 엉덩이 누르면 '무죄', 허벅지 만지면 '유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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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모(80)씨는 2014년 10월 지하철 전동차에서 급하게 내리면서 앞에 서 있던 김모(21·여)씨의 엉덩이를 주먹으로 눌렀습니다. 피해자 김씨는 “심한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김씨는 지난해 6월 지하철역에서 여고생의 허벅지를 만진 혐의로도 재판에 넘겨진 상태였는데요. 법원은 이러한 김씨의 행위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같은 사람의 같은 행위에 대해 법원은 왜 다른 판결을 내렸을까요?

김씨는 2014년 10월 19일 오후 5시 20분쯤 피해여성 김씨와 마천행 5호선 전동차를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적지인 장한평역에서 열차가 멈추자 출입문 근처에 서있던 김씨의 왼쪽 엉덩이를 주먹으로 눌렀습니다.

당황한 피해여성 김씨는 급히 걸음을 옮기는 김씨를 쫓아가 붙잡고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는 “피고인 김씨가 왼쪽 엉덩이를 마치 도장 찍듯이 꾹 누르고 갔고 이 때문에 넘어질 뻔 했다”며 “심한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피고인 김씨는 “화장실에 가려고 급히 내리려는데 출입문을 가로 막고 서 있어 밀었을 뿐“이고 주장했습니다.

피고인 김씨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습니다. 국민참여재판에 참석한 시민 배심원단 7명은 엉덩이를 주먹으로 누른 혐의에 대해 만장일치로 무죄 의견을 냈습니다. 서울 북부지법 형사11부(부장 김경)도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성추행을 하려 신체 접촉을 하는 일반적인 행위와 사뭇 다르고, 화장실에 가기 위해 급하게 전동차에서 내리려 ‘비키라’는 의미로 밀친 행동으로 보여진다”고 판시했습니다.

반면 김씨가 여고생의 허벅지를 만진 혐의에 대해서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김씨는 지난해 6월 29일 오후 3시쯤 1호선 청량리역 출구 계단에서 내려오던 오모(18)양의 교복 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허벅지를 만진 혐의로도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두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장소는 다르지만 피고인이 같아 두 사건이 한 재판부로 병합된 것입니다. 피고인 김씨는 당시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김씨는 재판에서 “손이 우연히 오 양의 신체에 스친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계단에는 옆 사람과 부딪힐 정도로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씨가 추행하는 모습을 본 목격자도 있었죠. 시민 배심원단은 여고생을 추행한 김씨의 행위에 대해선 5대 2의 의견으로 김씨의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재판부 역시 김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 강의 40시간도 명령했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인 김씨는 반성은 커녕 자신의 손이 우연히 피해자 신체에 스친 것이라고 변명하고 범행을 극구 부인했다”며 “오양에게 용서를 받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같은 사람이 비슷한 행위를 했음에도 판결이 엇갈린 이유는 사건이 벌어진 당시의 상황과 접촉 행위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북부지법 관계자는 “유무죄를 가른 한 가지 이유를 꼽을 수는 없다”면서도 “김씨가 급하게 전동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 피해자 김씨가 앞에 있어 접촉을 하게 된 상황과 계단에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도 오양과 접촉을 한 상황이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또 “주먹으로 엉덩이를 민 행위는 만지거나 쓰다듬는 등의 일반적인 성추행 행위와는 차이가 있다고 재판부가 판단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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