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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정으로 누더기 된 북한인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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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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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구 정치국제부문 기자

11년을 끌어온 북한인권법 통과가 다시 가물가물해지고 있다. 토요일인 지난 23일 여야가 북한인권법과 원샷법(기업활력제고법)을 29일 처리키로 합의했지만 노동법을 둘러싼 갈등으로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통일부 직원들은 아쉬워하기보다 오히려 안도하는 분위기다. 이유가 있다. 북한인권법이 관련 상임위인 국회 외교통일위 손을 떠나 ‘3+3 회동’ 등 원내 사령탑들의 흥정 대상에 오르면서 당초와 다른 누더기가 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북한인권기록보존소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고문이나 공개 처형, 정치범 수용, 강제노동 등 북한의 인권 침해 행위를 조사한 뒤 기록으로 남기는 기구다. 나중에 통일이 됐을 때 피해 구제를 받게 하거나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자는 취지에서다. 북한의 인권침해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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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여야는 이번에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통일부에 설치하기로 했다. 대신 통일부는 북한 내 인권 침해 조사·연구 자료를 3개월마다 법무부에 전달하기로 했다. 흥정의 결과다. 새누리당은 기록보존소를 법무부에 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통일부에 둬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야당은 “기록보존소를 법무부에 두면 ‘가해자 응징’에 방점이 찍혀 북한 정권을 자극할 수 있다”며 통일부에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5년 이후 11년 만에 법안을 처리하기 위해 여당은 야당의 요구를 들어줬다.

 문제는 이런 합의가 현실을 잘 모르는 얘기란 거다. 통일부 서기관급 이상 공무원 3명의 얘기가 그랬다. A씨는 “남북관계 개선이 통일부의 주 업무인데 북한 인권 침해 사례를 수집하는 기록보존소를 통일부에 두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B씨는 “서독의 예와도 안 맞는다. 1961년 11월 서독은 잘츠기터(Salzgitter)에 법무부 산하의 중앙법무기록보존소를 두고 동독의 인권 침해를 억지하는 효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C씨는 “야당이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며 통일부에 두자고 했는데, 남북대화를 해야 하는 통일부에 두는 게 오히려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해 개성을 다녀온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북한 인사들이 ‘왜 남조선 의원님들은 인권법을 처리하려고 하느냐’고 항의한 일이 있다”며 “그런 북한과 대화하고 협상하는 통일부에 북한 인권 침해를 고발하는 인권기구를 둔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얘기”라고 했다. 남북대화를 애틋해 하는 야당이 법무부가 못 미덥다고 인권기록보존소를 통일부에 두자는 건 사리에 안 맞는다고도 했다. 법은 만들 때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고치려면 그만큼의 진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처리해 놓고 보자는 식의 입법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김형구 정치국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