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野黨 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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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부리부리한 눈, 걸걸한 목청, 나비넥타이 차림의 열정과 투혼. 젊은 세대에겐 역사 속의 낯선 인물이지만 1956년부터 60년까지 이승만 자유당 정권과 맞서 싸운 민주당 대표는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1894~1960)선생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조병옥은 광주학생운동, 신간회.흥사단 사건 등으로 두차례에 걸쳐 5년 동안 감방생활을 했다. 그의 좌우명은 '지사(志士)형 정치시대'의 그것답게 '나보다는 당, 당보다는 나라'였다.

58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피를 토하듯 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은 李대통령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족했다. "각하는 국민의 입에다 말 모양으로 재갈을 물리고, 국민의 목에다 소 모양으로 멍에를 메게하고, 경찰의 공포와 위협정치로써 채찍질을 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를 더 이상 피로 물들이지 말고 또 각하의 80여생의 애국적 열정을 장식하는 국부라는 존칭을 영원히 민족사에 아로새기기 위하여 지금이라도 민주말살 정치를 지양하고…."

50년 야당사에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같이 정상에 오른 집념의 지도자도 있었으나, 조병옥은 대통령 후보에 나섰다 선거 한달 전 심장마비로 급서한 비운의 인물이었다. 조병옥의 길을 추적하다 보면 국가의 명운이 걸린 문제에서 야당 지도자에서 국가 지도자로의 변신이 과단성 있고 신속했던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이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무술경관들을 동원해 국가보안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킬 때는 미국조차 견제에 들어갔을 정도로 민주주의의 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 재일동포 북송방침을 결정하자 조병옥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며 야당과 언론을 설득해 초당적 대처에 앞장섰다. 파벌이 극심했던 당시 야당정치에서 반대파들에게 자리와 정치자금을 골고루 나눠주는 관대함과 따뜻함도 그의 정치의 특징이었다.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유석 조병옥 선생같은, 선이 굵은 정치를 본받고 싶다"고 했다. 마침 30일 과천 서울대공원 동물원 앞에선 유석 선생의 동상 제막식도 있었다. 새 야당 지도자 崔대표가 유석의 정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펼쳐나갈지 주목된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