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왕실 로맨스' 박소희 '宮' 단행본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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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 해도 순정만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은 왕자님이다. 신분.능력.외모가 남달리 뛰어나고, 소녀들을 사로잡는 그 뛰어남의 안쪽에는 사실 상처받기 쉬운 감성이 감춰져 있는 왕자님 말이다.

재벌 아들로, 학교의 우등생으로 혹은 일탈적인 반항아로 다양하게 변주되더라도 결국 숱한 남자주인공의 원형이 이 같은 '왕자님'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에는 왕자가 없는 걸까. 이런 아쉬움을 한번쯤 가져본 독자라면 박소희의 만화'궁(宮)'을 들쳐볼 만하다. 순정만화잡지'윙크'에 지난해 7월부터 연재 중인 '궁'은 다음 달 초 단행본 제3권이 묶여 나온다.

'궁'은 조선왕조가 입헌군주제 형태로 현대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왕세자는 아직 10대 소년으로 고교 재학중이다. 왕세자와 같은 고교에 다니는 평범한 소녀 채경은 알고 보니 할아버지들 사이의 약속 때문에 왕세자와 혼인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창너머로 왕세자를 훔쳐보던 처지에서 하루 아침에 신문 1면에 나란히 등장하게 된 채경과 본래 여자친구가 따로 있는 왕세자의 인연이 순탄할 리 없다.

작가 박소희(25)씨는 공주문화대 만화과를 나와 2000년 서울문화사 공모전으로 데뷔했다.

"고등학교(김해여고) 때 보충수업을 빼먹고 김수로왕릉에 놀러갔더니 전각이 텅 비어있잖아요. 경복궁도 비어 있는데, 거기 사람이 살고 있다면 어떨까, 이렇게 시작했죠."

작가가 '궁'1권 말미에 후기 형식의 만화로도 소개했던, 작품 구상 동기다.

왕세자와 채경이 어린시절 결혼이 약속된 사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이내 결혼식으로 이어질 만큼 줄거리 전개가 빠르다. 순정만화의 기둥이 로맨스고, '결혼=로맨스의 끝'이라는 통념에 비추어 보면 뜻밖이라고 했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온다.

"하루라도 빨리 궁궐 내부 생활을 그리고 싶었어요.빨리 결혼시킬 수밖에 없었죠."

신부의 친정에 혼인을 청하는 납채(納采),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 의식인 친영례(親迎禮) 등 용어풀이도 곧잘 지문에 등장한다. 작가가 들고 다니는 디지털 카메라에는 거북이 모양의 주춧돌이나 단청 문양 같은 배경그림용 사진이 잔뜩 들어 있다.

그래도 자료가 현존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상상을 모두 메워줄 수는 없다. 작가는 "왕실이 있는 영국이나 일본의 경우를 많이 참고한다"고 했다. 시대감각을 감안, 세자빈이 된 채경에게 평상복으로 개량 한복을 입히기도 한다.

기획 초기에는 '이런 황당한 설정을 독자들이 잘 받아줄까' 걱정도 했다는 게 작가의 말인데, 최근에는 인터넷에 팬이 '궁'홈페이지를 만들어 줄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인터넷 다음카페의 '대한황실재건회'회원들처럼 자발적으로 왕실에 대한 자료를 보내주는 이들도 생겼다.

"왕정복고요? 그런 게 아니고, 왕실의 결혼식 같은 이벤트가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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