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國賓방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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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영국과 러시아의 외교에서 국빈방문은 지난 1백29년 동안 단 한번밖에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기록도 1874년에 양국 왕실 간에 거행됐던 결혼식 때문이니 사실상 양국의 국빈 교류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1백29년의 전통이 깨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5일부터 나흘 동안 영국을 국빈방문한 것이다. 양국 간에 그동안 국빈방문이 이뤄지지 않은 데엔 비극(悲劇)스러운 사건이 존재한다.

최초로 영국을 국빈방문한 러시아 황제는 알렉산드르 2세였다. 자신의 딸을 영국 왕실에 시집보내면서 영국을 국빈방문한 것이다. 영국과 러시아의 왕실이 사돈이 된 후 러시아에서는 영국 붐이 일었다.

특히 영국식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러시아의 대상인들.귀족들은 앞다퉈 자식들을 영국에 유학시켰다. 이들은 또 영국 각지에 농장을 사고 런던에 대저택도 신축했다. 영국은행에 막대한 예금을 하기도 했다.

볼셰비키 혁명 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이 무참히 살해되자 영국 왕실은 큰 충격을 받고 러시아와 모든 교류를 단절했다.

하지만 소련이 확고한 기틀을 잡자 영국은 소련과 국교를 수립한 최초의 서방 국가가 됐다. 이후 일부 유럽 국가들은 국빈교류를 시작했지만 영국 왕실은 사돈 집안의 비극을 이유로 지난 1백29년 동안 러시아 지도자들의 국빈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련의 몰락과 함께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됐다.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후손들이 러시아를 방문했고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의 유골도 발굴됐다.

1994년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러시아를 방문했다. 이후 양국은 러.영 관계의 완전한 복원의 상징으로 국빈방문 성사를 위해 노력했다. 특히 에너지 분야에서 러시아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자 영국의 에너지 자본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지난 25일 시작된 푸틴의 국빈방문은 러시아 에너지 자원과 영국 에너지 자본의 결합을 예고한다. 실제로 푸틴과 블레어는 양국 간 에너지 협정서에 서명했다.

BP와 러시아 튜멘오일 간의 60억달러짜리 계약과 러시아산 가스의 영국 공급을 위한 60억달러짜리 파이프라인 건설 협정도 체결됐다. 1백29년 전의 국빈방문이 '붉은 피'의 결합이었다면 푸틴의 국빈방문은 '산업의 검은 피''에너지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