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워킹맘 칼럼

그래도 워킹맘의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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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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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문화부 차장

미혼 여성 독자의 요청을 받았다. 제발 워킹맘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를 써 달라고 했다. 언론에서도 주변에서도 워킹맘 얘기라면 고민과 한탄뿐이니 일과 육아의 양립 따윈 절대 안 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아차 싶었다. 숙제처럼 ‘좋은 일’을 찾아봤다.

 답은 크리스마스이브 서울 대학로에서 만났다. 취재차 혜화동 로터리 부근 ‘반디돌봄센터’에 들르면서다. 이곳은 배우·스태프 등 공연예술인 자녀만 이용 가능한 시간제 돌봄시설이다. 주로 밤에 공연하는 부모의 상황에 맞춰 오후 11시까지 운영한다. 평일엔 오후 1시, 낮 공연이 있는 주말에는 오전 9시에 문을 연다. 공연이 없는 월요일이 이곳의 쉬는 날이다. 보육료는 시간당 500원. 공연예술인들의 얇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책정한 액수다.

 24일 밤 9시 반디돌봄센터에 들어설 때만 해도 어쩐지 짠한 마음이 있었다.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 시간, 일하는 부모 기다리느라 크리스마스이브를 시설에서 보내야 한다는 게 썩 행복하진 않겠다 지레짐작한 탓이었다. 센터에는 아이들 4명과 2명의 선생님이 있었다.

 아이들은 잘 놀았다. 한참 소꿉장난을 하더니 공기놀이로 넘어갔다. 블록 맞추기와 색칠 공부도 했다. 일곱 살 동갑내기 준희와 풀잎은 1에서 100까지 숫자 세기 내기를 했다. 선생님과 체스도 뒀고, 루미큐브도 했다. 여자아이들끼리 서로 머리를 묶어 주며 놀기도 했다. TV와 스마트폰이 없는 환경에서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놀잇감을 바꿔 가며 어울려 놀았다.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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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오늘 엄마 공연하시니?” 열 살 소희에게 슬쩍 물었다. “네. 오늘이 첫 공연이에요. 우리 엄마가 쓴 연극이에요.” 목소리는 씩씩했다. 극작가 엄마에 대한 자부심이 생생히 읽혔다.

 반디돌봄센터는 문화체육관광부가 만들어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위탁 운영하는 국공립시설이다. 공연예술인들의 지속적인 요구에 따라 지난해 4월 문을 열었다. 밤 11시 두 딸을 데리러 온 공연 프로듀서 최빛나(39)씨는 “센터 덕분에 한시름 덜었다”며 웃었다. “센터 개소 전에는 일을 많이 못했다. 일이 늦게 끝나니 일반 어린이집에 맡기기도 곤란했다. 연습실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도 봤는데 모두가 힘들었다”고 지난날을 돌아봤다.

 이렇게 세상은 워킹맘에게 점점 좋은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여성의 노동력과 여성이 낳는 아이 모두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일과 육아 양립의 걸림돌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계속 커질지 모른다. 더 좋은 세상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하기 위해서다. 그 소리에 놀라 예비 워킹맘들이 지레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로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 중인 고2 내 딸에게 하는 당부이기도 하다.

이지영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