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일본 국민배우로 거듭난 ‘산타페’의 그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54호 6 면

1991년, 한 소녀가 사회현상이 됐다. 18세의 나이로 전라 사진집 『산타페』를 출간한 미야자와 리에(宮?りえ·42). 혼혈 특유의 신비한 외모로 미소녀 열풍을 주도하던 아이돌 스타였다. 무명 신인도 아닌 인기 스타의 누드집은 성문화가 개방된 일본에서도 유례없는 일. 스타 사진가 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의 손을 거친 『산타페』는 출간 즉시 150만 부가 팔리며 사진집 사상 최고 판매부수를 기록했고, 일본대중문화 개방 전이던 한국에도 이례적으로 라이선스 출간되는 등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됐었다.


그러나 ‘산타페의 영광’은 길지 않았다. 이듬해 19세 나이로 스모 스타와 약혼 발표를 한 지 두 달 만에 파혼을 하더니 그 충격으로 활동을 거의 중단한 것. 거식증에 걸렸다는 소문과 함께 앙상한 외모로 변해갔고, 자살소동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자연히 대중의 관심은 멀어졌고, 우리 기억 속에도 ‘산타페’의 센세이션으로만 남았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한국에 온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원작 소설을 세계적인 연출 거장 니나가와 유키오(?川幸雄)가 무대화한 연극 ‘해변의 카프카’(24~28일 LG아트센터)의 여주인공을 맡은 것. ‘니나가와 탄생 80년’을 기념한 월드투어의 일환으로 런던·뉴욕·싱가폴을 거쳐 서울에 입성한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90년대 후반 이민설까지 돌며 일본에서도 잊혀져가던 그는 2002년 홍콩영화 ‘유원몽경’으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후 ‘황혼의 사무라이’(2002), ‘아버지와 산다면’(2004)도 대부분의 영화상을 휩쓸며 ‘21세기 가장 상복 많은 여배우’가 됐고, 최근작 ‘종이달’(2014)도 일본아카데미상과 도쿄국제영화제에서 나란히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명실공히 ‘연기파 배우’로 거듭난 것이다.


이쯤되면 스크린에 안주할 법도 한데, 무대에도 일찌감치 진출했다. 2004년 유명 연출가 노다 히데키(野田秀樹)의 ‘투명인간의 증기’로 연극에 입문하자마자 요미우리 연극대상을 받았고, 3년 전부터는 최고 배우만 상대하는 니나가와 유키오의 페르소나가 됐다. ‘시타야만넨초 이야기(下谷万年町物語)’, ‘맹도견’, ‘불과 같이 외로운 누이가 있고’ 등에 연거푸 출연했고, 내년 1월 신작 ‘겐로쿠 미나토우타(元祿港歌)’ 출연도 확정됐다.


왕년의 아이돌을 ‘국민 여배우’로 변신시킨 동력은 뭘까. 그는 최근 한 방송에서 첫 연극에 함께 출연한 희극배우 아베 사다오(阿部サダヲ)에게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고백했다. “재주가 많아 보여줄 게 많은 그에 비해 저는 딱히 내세울 게 없더군요. 그때 ‘40살에는 무대에 편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목표로 10년을 보내자 결심했죠.”


엄격하기로 유명한 니나가와에 대해서도 ‘불가능할 정도로 허들이 높은 숙제’를 던지기에 더 에너지가 솟는다고 했다. “결국 저 높은 허들을 과연 넘을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죠. 본 적도 없는 세상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 강하거든요.”


‘해변의 카프카’는 하루키 장편소설 중 처음으로 무대화된 작품. 삶의 의미를 찾아 집을 나선 15세 소년이 방황하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하루키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3분 안에 객석을 사로잡는’ 니나가와의 마술적 미장센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하루키 단편을 영화화한 ‘토니 타키타니’(2005)에서도 1인 2역을 했던 미야자와는 모성을 상징하는 도서관장 사에키의 40대와 10대를 오가며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감정을 분출하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활시위를 당기기 직전과 같은’ 긴장감과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는 역할이다. 그는 일본 잡지 ?예술신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하루키 월드 속 여성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연기하고 있어요. 니나가와씨와 무라카미씨의 뇌 속을 여행하는 느낌이 즐겁습니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LG아트센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