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혜순(1955~)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부분

이 음악은 이제 너무 들었어요 지겨워요
열두 곡이 다 흐른 다음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잖아요?
스위치를 누르면 눈이 휘날리지요
다시 누르면 벚꽃 축제, 아니에요?
윤전기는 쉴새없이 돌아가고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 공장 가득 쌓여 있어요
어느쯤에서 태양이 타오르고
어느쯤에서 장마가 시작되는지 난 다 외웠어요
음악이란 모조리 되풀이되는 푸가, 아니에요?
물이 흐른다, 얼음이 얼고, 그 위에 눈이 쌓이고
지하로 눈 녹은 물이 스며들고, 그 다음엔 물 아지랑이 피어올라요



달력 속 늘씬한 비키니 아가씨. 안 봐야 하는데 눈길 쏠리던 소년. 흉내내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꿈꾼 소녀. 유혹되지 않아야 하는데 실제로 벗고 눕던 여배우. 제발 이런 달력 만들지 말자는 맹세를 연말마다 한 달력 공장 공장장. 그 사람들 다 살아있다, 윤회한다. 그 사람들 지겹도록 달력 앞에 윤회시키는 진짜 '공장장님'이 있다. 그 공장장님을 향해 흔드는 깃발을, 공장장님이여, 볼 때가 지났다.

박덕규<시인.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