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가 나비 꿈꾸듯 … 24년 만에 데뷔 성공한 40대 보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기사 이미지

왼쪽부터 황치성·박상진·한재철씨. [사진 번밴드]

“망설이다 놓쳐버린 게 24년입니다. 나비를 꿈꾸는 번데기 날갯짓은 이제 시작입니다.”

3인조 ‘번 밴드’ 결성한 한재철씨
주말 광안리?태종대서 거리 공연
20대 때 앨범 준비 중 자금난에 좌절
우울증·알코올중독 등으로 방황도

 올 초 부산에서 3인조 그룹 ‘번 밴드’를 결성한 보컬 한재철(44)씨의 말이다. 경남 양산 출신인 그는 통기타 동아리가 있다는 이유로 부산정보대(현 부산과학기술대)에 진학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기타를 배운 지 1년 만에 부산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공연할 만큼 재능도 있었다. 군 전역 후에는 부산의 지인 집에서 지내며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했다. 실력을 인정받은 한씨는 하루 7차례 공연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틈틈이 작사·작곡도 했다. 자신의 노래가 있는 ‘진짜 가수’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02년 5월 자신의 공연을 본 적이 있는 작곡가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불러주길 바란다며 제작자를 소개해줬다. 한씨는 계약금 500만원 등에 계약한 뒤 상경했다. 이후 원룸 연습실에서 7개월 동안 연습해 11곡이 수록된 정규앨범 녹음을 마쳤다. 하지만 뮤직비디오를 찍던 중 음반시장에 불황이 덮쳐 회사가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제작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기약 없이 가수 데뷔를 기다리던 한씨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술로 나날을 보냈다. 좌절감과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 그를 짓눌렀다. 한씨는 “꿈이 한순간 물거품되면서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살다 죽겠지란 생각에 삶에 의욕을 잃었다”고 회고했다.부산 광안리에서 거리공연을 하며 지내던 2013년 겨울에는 우울증마저 극에 달했다. 아내와 별거하던 한씨는 문 을 걸어잠그고 술만 마셨다. 씻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오늘까지만 술마시고 내일 죽자’란 생각도 수시로 했다. 그렇게 두 달을 보내자 손발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더 음악을 해보고 죽으면 안 될까.” 그토록 하고 싶었던 자신의 음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는 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빠질 것도 없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병원에서 몸을 추스른 그는 지난 3월 후배 두 명을 설득해 ‘번 밴드’를 결성했다. 한씨는 “모든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건 아니다. 아등바등 나비가 되려는 번데기가 꼭 나를 닮았다”며 “번 밴드는 나비를 꿈꾸는 번데기 밴드”라고 설명했다.

 보컬 겸 통기타와 드럼·베이스로 이뤄진 멤버 중 한씨만 다른 직업이 없다. 성악을 전공한 베이스 박상진(39)씨는 오페라 공연 등을 하고 드럼의 황치성(37)씨는 실용음악학원을 운영한다. 번 밴드는 지난 8월 20일 부산 청년문화단체 등의 도움을 받아 밴드 소개 영상을 만들고 밴드를 알리는 특별공연을 했다. 이 공연에서 한씨는 젊은 시절 만든 노래 ‘우울한 날에’와 ‘바보에요’를 처음 선보였다.

 번 밴드는 주말 오후 6~9시 광안리·태종대 등에서 거리공연을 한다. 공연 뒤 밴드의 노래 CD를 판매한다. 번 밴드는 앞으로 전자기타와 키보드 멤버를 확충하고 음반 제작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한씨는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음악을 찾을 때까지 음악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유명한 기자 famou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