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다큐멘터리 진행자를 아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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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노사모'의 핵심이었던 배우 문성근씨가 KBS-1TV '다큐멘터리 인물 현대사'의 진행자로 내정된 것을 둘러싼 소용돌이가 점입가경이다.

'역사 스페셜'폐지와 맞물려 언론보도와 네티즌들의 갑론을박이 인터넷을 달구더니 급기야 15일 국회 제1당인 한나라당은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는 문씨의 사회자 내정은 당연히 취소해야 한다'는 논평까지 냈다.

당사자인 문씨도 '정치로 내몰지 말라'며 김영삼.노태우 정권 당시 방송 출연자로 내정됐다가 취소됐던 전력을 들며 구여당인 한나라당을 반격했다. KBS 프로듀서협회는 16일 '인물 현대사는 역사학계의 조언을 받아 인물을 엄선했고 제작진의 합의를 거쳐 진행자를 선정했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선거를 코앞에 둔 정치 시즌도 아니고, 사회의 각 현안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편을 갈라 말씨름을 벌이는 시사토론 프로그램의 사회자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시끌벅적? 참으로 이상했다.

선거에 즈음한 기간이라면 방송법.선거관리법은 물론 각 방송사의 선거방송 내부지침에 따라 특정후보 광고방송이 아닌 다음에야 정치적 견해를 밝힌 이는 출연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 그러나 지금은 대선이 끝난 지 오래고, 국회의원 선거는 아직 먼, 모든 이가 생업에 열중하는 때가 아닌가. 누구를 지지했건, 반대했건 간에 그것을 족쇄로 먹고 사는 일에 발목을 잡을 수는 없다.

사실, 다큐멘터리의 진행자란 구성작가가 쓴 대본에 따라 시작과 끝을 알리고, 장면과 장면이 부드럽게 이어지게 하는 징검다리다. 프로그램을 쥐락펴락하는 듯 보이지만 인터뷰어처럼 질문의 자유도, 시사토론 프로그램 사회자처럼 참석자의 발언권을 쥔 존재도 아니다.

더구나 역사다큐멘터리는 녹화방영물이라 생방송처럼 제작진의 허를 찌르며 진행자가 애드 리브로 '사고'를 칠 여지도 없다. 게다가 '인물 현대사'에는 12명의 자문위원, 8명의 프로듀서, 6명의 구성작가가 매달려 있다. '천하의 문성근'이라 해도 현장취재가 완료된 후 방영일을 이틀 앞두고 스튜디오에서 중간중간 토막내 가며 자신의 몫을 촬영하는 것이 전부다. 이미지 장사다.

방송제작 내막을 잘 알지 못해, 혹은 문성근씨의 존재가 너무 커서(?) 벌어진 호들갑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찜찜하다. 4월 20일자 중앙일보는 '영화배우 문성근이 오는 5월 개편에서 신설되는 KBS-1TV '다큐멘터리 인물 현대사'(가제)의 진행을 맡아 방송에 복귀한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KBS 이사회로부터 정연주 사장이 추천받기 3일 전, 사장 취임 8일 전이다.

뒤늦은 '문성근 논란'에서 나는 '진실 비틀기의 술수'의 그림자를 본다. 매니어층이 적지 않았던 '역사스페셜'이 지난 7일 종영을 알리자 이를 아쉬워하는 분위기에 슬쩍 편승해 추측과 가정을 보태 새 프로그램을 덧칠하고 KBS의 새 사령탑인 정연주 사장과 진행자 문성근씨를 공격목표로 삼은 교묘한 비틀기. 최종 과녁이 된 문씨는 녹화장에 서기도 전에 프로를 총괄하는 PD를 제치고 프로그램의 절대자인 양 비춰지고 있다.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가정과 추측으로 비난을 양산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사물을 바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태도를 익히기보다 음모론적 시각으로 분석하는 법부터 익힌 구성원들로 이뤄진 사회는 분열과 공동 파멸을 불러올 뿐이다. 위법성이 없는 한 새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는 방영 후 시청자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정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홍은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