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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일본군 전략요충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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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국토 최남단 마라도가 한걸음에 닿을 듯 보이는 해발 89m의 화산.

3년여전 개발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던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송악산은 '제주 절경의 극치'라는 찬사를 받고 있지만 해안절벽에 묻혀있는 애틋한 역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파도와 만나는 송악산의 해안절벽에는 15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구축한 인공동굴이다.어뢰정을 은폐, 전함이 나타나면 육탄돌진하는 일제식의 '가미가제(神風)' 방어진지형 동굴이다.

일제시대 진지동굴을 비롯 우리 역사의 참상을 대변하는 제주의 근대유산들이 그 실체를 드러냈다.

탐라대 산업기술연구소(소장 양상호)와 제주도 동굴연구소(소장 손인석 박사)가 1년여간의 작업끝에 내놓은 '제주도 근대문화유산 조사보고서'는 그 실체와 보존의 시급성을 요구하고 있다.

?역사 되새기는 방어진지.동굴=일제가 패망직전 '태평양결(決)7호작전'을 수행하며 구축한 제주도내 진지동굴은 도내 역사.동굴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대상이었다.

일부 동굴이 1948년 제주에서 일어난 4.3사건 당시 입산 게릴라인 '무장대'의 거점으로 활용됐고, 지금도 재확인되는 진지동굴에서는 당시의 생활도구와 유골 등 잔해들이 수시로 발견되고 있다.

3년여전부터 부분 조사를 벌였던 제주도 동굴연구소는 지난해 제주도의 종합조사 의뢰에 따라 다시 본격적인 조사에 나서 최근 조사를 마무리했다.

조사결과 제주도내 전역에는 모두 1백13개소의 진지.인공동굴이 구축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북제주군 한경면 청수리의 기생화산 가마오름의 진지동굴은 2~4m의 폭과 높이를 갖춘 2층 구조의 동굴로 총 길이 1.2㎞에 걸쳐 뻗어있다.연구소는 출입구 10곳을 갖춘 사통팔달형 구조로 지어진 이 곳이 1945년 일본 58군단 지휘부 진지로 추정했다.

손소장은 "제주도의 일제시대 전쟁유적은 일본 해군사령부가 주둔했던 오키나와와 맞먹는 규모로 당시 제주에 대한 전략적 구상을 실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념비적 건축물도 많아=탐라대 산업기술연구소는 19세기 말부터 1960년대까지의 건축물과 구조물,기념비 등을 근대문화유산의 조사대상으로 삼았다.

주목을 끄는 곳은 중국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건설한 남제주군 대정읍 송악산 부근 알뜨르 비행장이다. 이 지역은 지금도 지하벙커와 관제탑 등 흔적이 남아 있으며, 두께 1m의 격납고 23기가 산재해 있다.

산업기술연구소는 58년 건축된 북제주군 구좌읍 전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 '귀빈사'의 경우도 역사적 가치가 높아 영구보존이 필요한 건축몰로 꼽았다. 산업기술연구소는 1906년 제주 최초로 세워진 북제주군 우도등대 등 1백1곳을 근대문화유산의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다.

제주지역에는 이미 근대사에 상징적 가치가 큰 남제주군 대정읍 모슬포 강병대교회(한국전쟁중 모슬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 관련 종교시설로 1952년 건축) 등 11곳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양소장은 "비롯 일제시대 건축물이나 시설이지만 내부 구조를 제외하고는 제주 풍토에 맞추려는 건축양식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며 "인위적인 건축문화 수용을 자제하고 자연환경을 중시, 토착성을 따른 것이 제주근대 건축물의 특징적인 면"이라고 말했다.

?체계적 보전관리대책 시급=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일제하 각종 방어진지 등 유적은 현재 심각한 훼손단계에 놓여있다. 모슬포 비행장의 일부 격납고는 농산물 저장고나 쓰레기 야적장으로 전락하는 일이 빈번하고 일부 동굴 역시 붕괴단계에 있지만 사실상 방치상태다.

당국도 "인공동굴은 천연동굴과 달라 보전을 위한 관계법령이 없다"며 손을 못쓰는 상황이다.

제주대 송재호(관광정책학)교수는 "제주도같이 2차대전 말기 일본군의 전쟁유적이 산재한 일본의 오키나와와 사이판 지역이 그 자원을 활용, 관광부가가치를 극대화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아픈 역사'이지만 눈을 돌려보면 국제관광지 제주의 훌륭한 자원"이라고 말했다.

양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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