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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몸 할아버지 불탄 집, 다시 세워준 홍천 소방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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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난 4월 화재로 집을 잃은 김종봉씨(왼쪽)가 도움을 준 소방관들과 얘기하고 있다. [박진호 기자]

중절모를 쓴 70대 노인이 콘크리트로 다져놓은 집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뒤 그는 용접하던 인부에게 다가가 “이 집에 화장실이 정말 있남”이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인부가 “네. 여기가 화장실이고요. 저기가 보일러실이에요”라고 설명하자 이 노인은 그제서야 “이제 죽을 때꺼정 걱정이 없겠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10일 강원도 홍천군 동면 방량리 주택 건설현장을 찾은 김종봉(76)씨는 “이런 새집이 내 집이라니 믿기질 않는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원래 김씨의 집은 이곳에서 600m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컨테이너와 벽돌로 만든 오래된 농가 주택에는 욕실이 없어 김씨는 농사일을 마친 뒤에도 제대로 씻을 수 없었다. 10m가량 떨어진 곳의 이동식 화장실은 늘 악취가 심했다.

 그러던 중 지난 4월 15일 오후 혼자 살던 김씨가 외출한 사이에 집에 불이 났다. 연탄보일러 과열이 원인이었다. 119가 출동했지만 이미 집은 잿더미로 변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던 김씨는 강원도 태백에 있는 강원케어센터에 몸을 의지했다. 1970~80년대 탄광에서 근무하다 진폐 장애 9급을 받아 입소가 가능했다. 하지만 친구 한 명 없는 요양시설에서의 삶은 외로움 그 자체였다. 김씨는 “밤마다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다.

 김씨의 안타까운 사연은 강승헌(46) 당시 홍천소방서 화재조사관을 통해 ‘강원119행복기금’에 전해졌다. 이 기금은 화재로 집을 잃은 주민들을 돕기 위해 강원도 소방공무원들이 지난 2월부터 매달 한 계좌(1190원) 이상 자발적 기부로 모으고 있다. 현재 2095명이 참여해 4153만원을 모았다. 그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김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됐다.

 시민들도 동참하고 나섰다. 어린 시절 화상으로 장애 등급을 받은 김금주(46·여) 홍천환경산업 대표는 1500만원을 선뜻 내놨다. 집터는 김씨와 10년 전부터 이웃사촌처럼 지내온 양항석(59)씨가 자신의 집 바로 옆의 땅을 무료로 제공했다. 양씨는 “형님이 갈 데가 없으면 당연히 동생이 나서야 하지 않겠나. 막걸리도 한 잔씩 하며 오순도순 살겠다”고 말했다.

 건축은 강원주거복지협동조합이 맡아 자재비와 인건비를 최소화했다. 또 화재에 취약한 연탄보일러 대신 기름보일러를 들여놓고 소화기와 화재경보기도 설치했다. 25.7㎡(약 7.8평) 크기인 김씨의 새집은 추석 전인 오는 20일 완공될 예정이다. 24일엔 소방공무원들이 모여 조촐하게 집들이도 하기로 했다.

홍천=박진호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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