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철<고려대교수·경제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정월초 이튿날 남들은 아직도 아침잠에서 덜 깨였을 그 이른시간에 벌써 일손이 바쁜 어느 여공의 얼굴이 TV화면에 비친다. 고생스럽지 않느냐는 의례적인 질문에 수출업체에서 일하고있기 때문에 긍지를 갖고 있다는 대담이다. 같은 경우에 일본의 여공은 회사를 위한 일인데 뭐 힘들게 있느냐는 반문을, 그리고 미국의 처녀는 휴일수당이 좋아 불만이 없다는 대담을 했으리라는 상상을 해 본다.
우리의 처녀일꾼은 분명 수출품의 생산처럼 국민경제를 돕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믿고 있거나 실체로 속마음은 다르더라도 남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전경련을 비롯한 경제단체들은 금년에 외화절약을 위한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일 계획이란다. 그렇지 않아도 외채가 문제가 되고 있는 이때 외채를 빌어다 쏜 장본인들이 외채절감혼동율 추진한다니 다행스러운 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석연치 않은점이 한들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기업은 누가 뭐라 안해도 한푼의 외채도 조심해 빌어오고 또 아껴 써야 하는데 그것은 경영의 원리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기업은 지금껏 외화절약을 게을리했단 말인가?
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마치 정부의 정책에 협조하고 국민경제를 돕기 위해 하는 일로 선전하고 있는가? 더 신기한 사실은 이러한 선직적인 절약운동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있다.
어디 그뿐이랴. 전경련의 금년도 사업계획은 경제부처의업무계획을 무색케 하고 있다.
최근의 어느 신문기사는 정부의 간섭을 못 마땅해 하는 대기업 경영자들의 불평을 보도하면서 왜 이들이 생산성향상으로 원가를 줄여 자발적으로 가격을 낮출 생각은하지 않고 있느가 반문하고 있다. 가격이란 시장의 수급에 따라 결성되는 것이지만 이 기사는 물가안성이라는 정책목표달성을 위한 경영자들의 노력이 부족함을 질책하고 있다.
위에서 열거한 몇가지 예는 반드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볼수는 없으나 흔히 있는 일로서 개인의 욕구는 될 수 있으면 감추고 기업도 이윤보다는 사회적인 책임을 앞세워 집단의 연대적 공동의식을 강조하는 우리사회의 전통과 속성을 내보이고 있다. 우리경제에 있어서는 바로 이러한 전통적인 의식구조가 시장경제의 정착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경제시장 자율화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의 하나가되고 있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보장된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가계와 기업은 자기의 이익외에는 관심이 없으며 이를 외해 남들과 경쟁하며 그 과정에서 쉴새없이 충돌하게 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의 가격 메커니즘은 충돌과 경쟁이 조화를 이루도록 경제주체를 유도하여 효율적인 생산과 자원의 배분을 가능케 한다. 시장경제의 묘미는 가계와 기업 모두가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의 상충과 경쟁관계가 있으나 바로 이러한 경쟁관계가 서로간의 타협과 양보를 유도하여 안정된 경제질서를 유지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개인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고 기업은 이윤에 대한 집착을 감추면서 국가경제와 공익을 앞세워 각자의 경제활동을 합리화 할때 사회의 집단과 계층은 남에게 양보할 것도 없고 타협할 여유도 갖지 못한다. 모두가 국가와 민족 위해 일하고 있는데 누구에게 무엇을 양보하고 타협을 하겠는가?
결국 경제집단간의 경쟁과 갈등은 각자의 주장만을 반복하는 평행선을 긋게되어 결국은 그들간의 힘의 대결과 강압에 의해 해결되는 불안정한 경제질서를 초래하게 된다.
필자는 서구의 자유주의나 개인주의가 우리사회에 있어서 어떻게 소화되어 자리를 잡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본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거의 위선에 가까운 전통적인 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기업에는 이윤동기보다는 사회적 윤리를 강조하고 국가경제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희생을 합리화한다면 시장경제는 정착되기 어려울 것이다.
기업의 1차적인 책임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 고용자들을 잘 돌보고 기업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적정의 배당을 보강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부실기업처럼 무책임한 기업이 어디 있겠는가? 부실기업을 놓고 사회적인 윤리를 강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수출업체에서 일하든 내수업체에서 일하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가경제를적정하기 전에 개인은 자기와 가정의 현재와 장래를 생각해서 가장 유리한 직장과 일을 찾아야하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선택권의 행사다.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개인의 욕구와 선택에 따라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그것이 합리적인 경제활동으로 인식되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며 시장에 있어서 선택권의자유가 보장될 때 비로소 시장경제는 그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