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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찬 동양인 여성, 남성·백인의 유리천장 깨다

미주중앙

입력

삭스핍스애비뉴 휴스턴 점 비주얼 팀 매니저인 카렌 최씨가 삭스핍스애비뉴 베벌리힐스 점 여성복 매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현식 기자

탁월한 감각과 노력으로 고속 승진
입사 15년 만에 매출 3위 지점 맡아

이젠 41개 매장 비주얼 매니저 중
최고 실력 인정받는 유일한 동양인

작년, 판매쪽에서 받던 관례 깨고
본사 최우수 매니저상 이례적 수상

#환상은 편견을 낳는다

만약 그것이 직업과 관련된 환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난무하는 정글 같은 밥벌이 현장에서 환상이라니. 그러나 세계 최고급 백화점 비주얼 팀 매니저라 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지려나. 일터가 백화점이라니 그것도 시즌마다 쇼윈도 디스플레이를 진두지휘한다니 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아마도 매일 런웨이 모델처럼 차려입고 출근해 멋진 패션을 둘러보는 게 일과의 대부분이 아닐까 하는 환상이 아주 없진 않았다. 그러나 이 어쭙잖은 편견은 금세 보기 좋게 빗나갔다. 책상 밑 가지런히 놓인 스니커즈와 운동화가 말해주고 있듯 그녀의 일상은 백화점 안을 눈썹 휘날리며 날아다니고 시즌별 프로젝트를 위해 밤늦게까지 야근하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시간들로 점철돼 있다.

자타공인 세계 최고급 백화점인 삭스핍스애비뉴(saks fifth avenue, 이하 삭스) 휴스턴 점 비주얼 팀 카렌 최(42) 매니저. 입사 15년차 베테랑 매니저이지만 그 어떤 환상도 즐길 틈 없이 이 험난한 정글 속에서 오로지 일에 대한 열정과 실력만으로 유리천장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LA를 방문한 그녀를 삭스 베벌리힐스 점에서 만났다. 화려한 백화점 속 그녀는 씩씩한 여전사 같았다. 이 낯선 조합이 주는 신선함이라니. 반전이 거듭되는 그녀와의 만남은 유쾌했다.

#유리천장을 향한 질주

14세 때 LA로 가족이민 온 그녀는 FIDM 시각미술학과를 졸업 후 1996년 코스타메사 메이시스 백화점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몇 년 뒤 그녀에게 운명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히 베벌리힐스 삭스 앞을 지나다 마침 쇼윈도 안에서 장식이 한창인 직원들을 보고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쇼윈도를 노크 한 것이다. '나도 당신들처럼 디스플레이어가 되고 싶다고. 혹시 삭스에 잡 오프닝이 있냐'고. 무작정 '들이댄' 당돌한 그녀의 프로포즈는 삭스 매니저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그길로 일사천리 인터뷰가 진행됐고 2001년 그녀는 삭스에 디스플레이어로 입사하게 된다. 디스플레이어란 쇼윈도뿐 아니라 매장에서부터 화장실까지 백화점 내 모든 공간을 재창조하는 직업이다. 그녀가 대학시절부터 꿈꿔왔던 일이기도 했다.

입사 후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각을 나타냈다. 하루 열 두 시간씩 일하는 지독한 승부근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공간을 재창조하는 감각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녀는 입사 8개월 만에 샌타바버러 점 디스플레이어들을 총괄하는 비주얼 팀 매니저로 유례없는 초고속 승진을 한다. 그곳에서 4년을 보낸 뒤 코스타메사 점을 거쳐 그녀는 2011년부터 현재까지 휴스턴 점에서 근무 중이다. 휴스턴 점은 뉴욕 본점과 베벌리힐스 점 다음으로 삭스 전국 매장 중 세 번째로 큰 규모와 매출을 자랑한다.

"전 일복이 따라다녀요.(웃음) 코스타메사도 리모델링을 앞두고 발령받았고 지금 휴스턴점도 한창 리모델링 중이죠. 코스타메사 근무 때 리모델링에도 불구하고 매출 감소 없이 공간 활용 호평까지 이어지면서 이를 회사가 높이 평가해 전국 3위 규모의 휴스턴 점으로 오게 됐죠."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현재 전국 삭스 매장 41곳 비주얼 팀 매니저들 중 그녀는 유일한 동양인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 서바이벌만도 험난한 정글에서 유리천장을 뚫고 여기까지 왔을까.

그녀가 첫 번째로 꼽는 성공비결은 당연하게도 실력. 그녀의 공간 배치 능력과 마네킹 디스플레이는 이미 삭스가 인정한 업계 최고다. 덕분에 그녀가 주도한 쇼윈도와 마네킹 디스플레이는 항상 모자부터 의상, 구두, 액세서리까지 완판행진을 이어간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다보니 상복은 절로 따라왔다. 휴스턴 점으로 발령받은 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그녀는 3년 연속 삭스 휴스턴 점이 분기별로 선정하는 우수 매니저 상을 수상했다. 또 작년엔 삭스 본사가 매년 지점별 우수 매니저상 수상자들을 후보군으로 하여 수여하는 최우수 매니저 상(서부지역)까지 거머쥐었다. 이 상들은 매출 기여도가 가장 중요한 선정기준이다 보니 매년 판매팀 매니저가 받는 게 관례였는데 그녀가 휴스턴 점으로 부임하고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진 셈이다.

"이렇게 회사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억지로가 아닌 즐기면서 일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감히 전 유리천장 같은 건 스스로 만드는 거라 생각해요. 열정을 가지고 일한다면 유리 아니라 다이아몬드도 부술 수 있으니까요.(웃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이 여기까지 달려 올 수 있었던 것은 항상 자신을 지지해 주는 부모님의 밤낮 없는 기도 덕분이었다고 강조했다.

#골드미스, 진정한 행복의 길을 묻다

그녀, 어느새 직장생활 20년차 골드미스다.

결코 짧지 않은 이 세월 동안 어찌 콧노래만 불렀겠는가. 고속승진을 질투하는 동료들의 따돌림과 새 발령지에선 텃세에 시달리기도 했고 때론 냉혹한 비판에 밤잠도 설쳤다. 직장인이라면 겪을 법한 크고 작은 일들이 그녀에게도 공평하게 일어났다. 초년병 시절엔 이직을 고려해보기도 했고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고 난 이 골드미스, 직장생활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법을, 자신을 지키는 법을 터득했다.

"이 세계에선 정답이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비판할 땐 일단 경청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다치진 않아요. 이젠 제 일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에 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경지엔 이른 거죠.(웃음)"

그렇다고 그녀가 과도한 자신감으로 중무장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전보다 생각은 깊어지고 카리스마는 한층 더 부드러워졌 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모든 일을 내 손으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피곤한 완벽주의자였죠. 그러나 이젠 제 생활과 일에 균형을 잡을 줄 알게 됐고 커리어도 중요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

이 짧은 휴가가 끝나면 그녀는 다시 전쟁 같은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화려하지만 거칠고, 냉혹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 시끌벅적 고단한 저자거리에서 그녀, 머지않아 행복의 화두에 대한 답을 찾을 것이다. 그녀의 쇼윈도 세상만큼 근사하고 멋진 해답을.

이주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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