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을 바꾼 대실수 77, 정답은 무엇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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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제37기 왕위전 본선리그 제20국
[제5보 (65~82)]
白.曺薰鉉 9단| 黑.趙漢乘 6단

조훈현9단이 막 일본에서 돌아와 공군 졸병 복장을 하고 다니던 시절, 당대의 괴걸이자 독설가였던 정창현7단은 조훈현9단만 보면 "우리 사위"라고 불렀다. 그의 딸은 이제 겨우 중학생이었지만 막무가내로 사위라고 부르는데야 어쩔 것인가.

'면도날'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졌던 정창현7단은 바둑을 보는 눈이 예리해서 曺9단이 곧 바둑계를 평정할 것이고 아무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공언했다. 曺9단이 중앙 무대의 첫 타이틀을 따냈을 때는 "우리 사위가 드디어 한강다리를 건넜다"고 했다.

鄭7단은 曺9단의 최대 장기를 '행마'와 '접전'이라고 했다. 그는 曺9단의 교묘한 행마에 당하고서는 "또 사기당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한다니까"하며 껄껄 웃곤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접전을 보면서 문득 정창현7단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이 바둑을 봤더라면 조한승6단에게 "너는 왜 맨날 사기나 당하고 다니냐"며 무척 놀렸을 것이다.

수순을 보자. 68부터 72까지 머리를 들이박으며 밀고들어가 74로 끊은 수순이 아무도 예상치 못한 강렬한 도전이다. 형세가 불리한 曺9단이 치열한 게릴라전으로 판을 흔들고 있다.

76으로 슬쩍 진로를 가로막았을 때가 중대한 기로. 그러나 趙6단은 무심히 77 나갔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순간 바둑은 역전됐다.

이때 바둑의 흐름이 역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놀랍게도 아무도 없었다. 曺9단만이 속으로 흐흐흐 웃고 있었다. 趙6단이 이상한 기미를 느낀 것은 82가 놓였을 때다. A의 머리를 얻어맞기는 죽어도 싫다. 이곳을 얻어맞으면 모양이 우그러져 귀를 잡아도 남는 게 없다.

그러나 '참고도' 흑1로 뻗는 날엔 백2로 간단히 잡히고 만다.

趙6단은 도둑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이 됐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흑이 크게 유리한 싸움이었고 행마도 아무 이상이 없어보였는데 어디서 당하고 말았을까.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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