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준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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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그가 훌훌 고국을 떠난 것은 1913년이었다. 18세의 나이로 백낙준소년은 단신 국경을 넘어 천율으로 갔다. 공부를 해야한다는 청운의 뜻이었다.
3년후 선변으로 미국행. 파크대(미주리주)에서 서한사전공. 선진국이 걸어온 발자취를 배워 우리민족의 「새로운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생각이었다.
1922년 다시 프린스턴신학대 입학. 이번엔 우리민족에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학업은 예일大 대학원으로 연장되어 종교사학을 전공했다. 학위논문은 『기독교 한국 부내사』.
18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백낙준박사는 일생을 통해 「연세인」이었다.
1925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연희전문(연세대 전신) 미국인 선교사를 알게 된후, 오늘 명예총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줄곧 연세대학교와 인연을 맺어 왔다. 정년 90세 가운데 60년의 인연이면 일생을 유감없이 다 바친 셈이다.
6·25동난 중 잠시 그는 궁인이 된 일이 있었다. 1950년 5월 문교장관에 취임. 그 난리 속에서도 그는 의무교육제와 교육자치제를 실시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처음으로 박사학위 수여의 길을 터놓은 것도 그의 문교장관 시절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 「교육열」에 불을 댕긴 바로 주인이었다.
초지일관-, 그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발전」의 길을 열고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는 젊은 시절의 뜻을 실현했다.
교육가이자 정치가이고 종교가이기도 했지만, 그의 마지막 생애는 경세가로 마쳤다.
그는 민주주의들 얘기하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교육을 『앞으로 인도해 낸다(E+ducate)』는 뜻으로 해석했다.
「새 시대의 정치」를 설파하며 그는 2천년전 공자의 「정자정」을 상기했다. 「치」란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라 「기른다」(목)는 뜻이라고 해석한 것도 인상적이다.
그가 지적한 우리 민족의 장단점은 누구나 마음에 새겨둘만 하다.
장점은 ⓛ이타적이다 ②창의성이 있다 ③끈기와 참을성이 있다 ④온유하다 ⑤낙천적이다.
단점은 ①지나치게 형식을 중시한다 ②파벌심이 강하다 ③의타심이 강하다 ④조직력과 단결심이 약하다 ⑤고식적이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한국인상 10인은 충무공·세종대왕·김유신·최충·정몽주·권율·곽재우·정약용·최익현·민영환.
고전 가운데 그에게 감명을 준 책은 양계초의 이탈리아건국 『삼걸부』, 「새뮤얼·스마일즈」의 『자조론』, 그리고 예수의 생애.
오랜 병고 속에 있던 백박사의 부음을 들으며 그의 달변속에 담겨 있던 경세훈들이 하나같이 웅변으로 되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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