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8)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4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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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리나라에서 여배우로 최초로 등장한 여인은 이월화다. 그는 1923년 윤백남이 감독으로 제작한 『월하의 맹설』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였고 그 다음에 윤백남이 제작한 『운영부』 에도 당연히 여주인공으로 출연할 것이었지만 윤백남은 김우연이라는 신인배우를 기용하였다. 이에 실망한 이월화는 자포자기의 생활에 빠졌고, 뒤에 김태진감독의 『뿔빠진 황소』와 『지나가의 비밀』등에 출연하였지만 지난날의 면목은 없었다. 마침내 조선권번의 기적에 들기까지 하여 완전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월화에 이어 여배우로 나타난 여자가 복혜숙이었다. 그는 이월화 뒤로 토월회에 들어가 연극배우 노릇을 하였는데 최초로 영화에 나타난 것은 1926년 조선키네마사에서 제작한 『농중조』에서였다.
복혜숙은 1904년 충남 대천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복기업은 대천에서 감리교회의 목사로 있었는데 미국이민을 지원했다가 부인의 트라홈 안질 때문에 못가게 되자 인천으로 이사하여 인천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여기서 어린 복혜숙은 서양사람 목사와 전도부인이 마시는 코피맛을 보고 이것에 맛들여 평생 코피를 마시게 되었다고 훨씬 뒤에 자신이 경영하던 다방 「비너스」에서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던 것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복혜숙이 8세때에 작고하였는데 어머니한테서 『소학』이니 『맹자』니 하는 한문을 배웠다. 복혜숙은 열두살때 혼자 서울에 올라와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었다.
3학년때 수공예품 전람회에 갔다가 일본여자의 설명을 듣고 수예선생이 될 것을 결심하고 이화고여를 졸업하자 16세로 일본에 건너가 횡준 기예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이 학교에 같이 간 사람이 나중에 여류비행사가 된 박경원이었다. 그러나 이학교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근처에 있는 영화관에 자주 출입하여 영화팬이 되어 버렸다.
기예학교를 졸업한뒤 18세에 동경으로 와서 택삼무용연구소에 들어가 연구생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복목사가 어떻게 알고 이무용연구소에 찾아와 할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였다.
아버지의 근무처인 강원도 금화교회로 돌아와 금화여학교의 선생이 되었지만 이미 연예계에 나가 활동할 결심을 굳힌 그는 시골 여학교 선생의 생활에 만족할리가 없었다.
서울로 탈출해 올라와 단성사에 단골로 출입하는 영화팬이 되었다. 여기서 단성사의 유명한 변사인 김덕경을 찾아가 배우가 되고 싶은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김덕경은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도저히 번의할 기색이 없는 것을 알고 「신극좌」의 김도산한테 소개해 주었다. 그때는 여배우가 드물었으므로 김도산은 좋다구나 하고 그를 받아 들였다. 그때 「신극좌」에는 변기종과 이경환이 활동하고 있었다.
복혜숙은 「신극좌」에서 변기종의 지도를 받으면서 배우수업을 했는데 혼자 셋방을 얻어 자취하면서 고생이 막심하였다. 그뒤 복혜숙은 현철과 이귀영이 세운 조선배우학교에 들어가 배우 수업을 더하고 22년 토월회에 입회하였다. 토월회에는 이월화가 나간지 오래고 적당한 여배우가 없었다. 복혜숙은 제8회공연때부터 참가해 『춘향전』과『카투사』등에 주연을 맡았다. 그뒤 토월회에는 복혜숙외에 새로 석금성도 참가해 왔었는데 복혜숙은 월급이 80원이고 석금성은 60원이었다.
극단에서 배우에게 월급을 준 것은 이것이 최초의 일인데, 토월회는 그때 허세를 부려 월급을 주었지만 사실은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 복혜숙은 『심청전』『장화홍연전』 『추풍감별곡』등 고대소설을 각색한 것에 주연으로 나타나 배우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관중은 자꾸 줄어들어 매월 적자운영을 하게 되어서 얼마안가 토월회는 해산되고 복혜숙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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