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행복어사전] 끝말잇기를 좋아하는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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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말잇기 좋아하는 남자를 안다. 올해 마흔인 그는 이른바 비자발적 독신이다. 그는 참 괜찮은 사람이다. 물론 남자 보기에 괜찮아도 여자가 볼 때는 별로일 수 있다. 사람을 보는 포인트가 다를 수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남자 중에서도 여자의 마음을 도무지 모르는 고루한 아저씨이므로 내가 좋다고 말하는 남자일수록 젊은 여자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합리적 의심까지 내가 막을 수도 없고 피할 도리도 없다.

그는 참 괜찮은 남자인데 왜 아직 혼자인 걸까. 내 생각에는 그가 끝말잇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이유를 댄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너무 생각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에게 필요한 건 생각이 아니라 과감한 결단과 행동이라고. 진도가 나가야 할 순간에도 그는 상대의 진심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손도 잡지 못한다고. 그러면 그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조언을 하는 친구의 진심이 무엇인지.

어떤 친구는 그의 외모를 지적했다. 요즘 여자들은 남자 외모를 많이 본다고. 헤어 스타일을 바꾸고 바지의 길이도 줄이고 폭도 좁히라고. 운동을 해서 살을 빼라고. 세상에 배 나온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다고. 그러면 그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마치 자신이 그 배의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어떤 선배는 그의 심성이 문제라고 했다. 사람이 너무 여리고 착해서 연애가 잘 안 되는 거다. 착해서야 이 위험한 세상에서 자기 한 몸 살아가기도 어렵다. 사람이 약고 모질고 독하고 악착같아야 겨우 살 수 있다. 선은 고대적인 가치다. 권선징악이 고대소설의 주제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현대적인 영웅들은 다 악당이다. 착한 사람은 평면적이다. 악당들은 동기가 분명하고 그리고 얼마나 입체적인가. 나빠져야 해. 악당이 되라고, 악당.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악당? 당신.”

그렇다. 그가 혼자인 것은 끝말잇기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누가 말을 걸면 그 끝말에 이을 낱말부터 떠올리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안녕하세요” 라고 내가 인사하자 그는 이렇게 인사를 받았다. “요? 요물.” 술자리에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면 그는 이렇게 말을 건다. “우리 끝말잇기나 할까요?” 엘리베이터에 모르는 사람과 탔을 때 다들 층수 번호가 바뀌는 걸 보고 있기 일쑤다. 그러나 그는 다르다. 같이 탄 사람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저 혹시 끝말잇기 좋아하세요?”

단지 끝말잇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여자들이 싫어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잠시 대화가 끊길 때 끝말잇기를 하면 무미건조한 시간이 재미있는 놀이와 흥미진진한 승부의 순간으로 바뀌지 않을까.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남자라면 순수하고 재치 있는 남자로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다. 끝말잇기를 좋아하는 남자를 여자들은 질색한다.

그는 모처럼 여자를 소개받아 만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헤어 스타일을 바꾸고 짧은 바지를 입고 다녀서인지 모른다. 그 동안 운동을 열심히 해 뱃살을 뺐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나는 그에게 조언했다. 원래 나는 누구에게든 조언하는 걸 싫어한다. 해준다고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도 없거니와 오히려 꼰대라는 욕만 듣기 십상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그에게 조언했다. 데이트할 때 절대 끝말잇기를 하지 말라고.

금지가 욕망을 만든다. 몇 번인가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식사자리에서 잠시 대화가 끊어졌을 때 그는 “혹시 끝말잇기 좋아하세요?” 라고 여자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는 여자가 사는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문 앞에서 여자가 “라면 먹고 갈래요?” 라고 물었을 때 그의 머릿속에 ‘요물’이란 낱말이 떠올랐지만 그는 가까스로 참았다.

여자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는 다짐했다. 이번에는 너무 망설이지 말자고. 여자가 커피를 들고 소파로 왔을 때 그는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가 눈을 감았다. 입을 맞추어도 좋다는 ‘그린 라이트’처럼. 여전히 망설이는 그에게 여자도 이렇게 속삭였다. “사랑해.” 그는 나빠지기로 했다. 악당이 되기로 했다. 그는 여자를 거칠게 껴안으면 말했다.

“해? 해질녘.”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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