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름대신 매듭단추 개화기 여성한복|덕성여대. 한복변천사 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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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개화기여성의 한복변천사를 한눈에 볼수 있는 의상발표회가 마련됐다.
덕성여대 의상학과는 16, 17 양일간 제19회 졸업발표회를 서울쌍문동 캠퍼스에서 열고 개화기여성의 한복·서양복·무대의상 등 1백50여점을 선보였다.
이중 개화기여성의 한복은 1890년대부터 1970년까지 10년을 한단위로 그시대의 대표적인 한복을 유품이나 소장품을 중심으로 고증을 거친 의상들.
실측에서부터 제작·연출·모델까지 모두 학생들의 솜씨로 이루어졌다.
개화기한복의 지도를 맡은 신란숙교수는 『조선시대의 한복은 박물관이나 사극을 통해 일반에 잘 알려져 있으나 근세복식사라 할 개화기 의상은 정보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며 최근들어 개화기복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학생들이 늘고있다고 말한다.
1890년대 한복을 선보인 이정신학생은 민운시씨 소장품인 민씨부인 한복을 그대로 고증한 것. 1895년으로 추정되는 이 한복은 옥색누빔 저고리에 남색치마로 치마길이는 발목위까지, 고름대신 매듭단추로 처리했으며 도련선을 바이어스를 대어 섬세하게 박음질했고 머리는 귀밑머리. 이마옆에서부터 조금씩 머리를 집어가면서 뒤로 땋은 형태로 요즈음 「디스코머리」라는 형태가 바로 이 시대의 머리모양이다.
1900년대는 저고리도 동정이 1890년대보다 좁아지고(1.5∼1.3㎝) 머리는 모두 넘겨 부풀려 뒤통수에 얹은 펌프머리가 유행이었다. 신발은 초기의 이화학당의 사진에서 보여주듯 구두와 고무신을 겸용하고 있다.
1910년대의 한복(이진화작)은 저고리가 짧고 끝동이 좁으며 깃폭도 좁고 고름도 짧은 것(30.4㎝)이 특징. 치마길이는 무릎밑으로 배래기폭이 아주 좁고 치마는 남자양복천을 이용해 플리츠 주름을 가지런히 잡았으며 머리는 차양머리. 양갈래로 나누어 밑에 5㎝를 남기고 빨간끈으로 감았다. 이당시 빨간댕기는 신여성의 상징.
또 1920년대(정정희작)는 저고리 길이가 겨드랑이밑에 바짝 닿을 만큼 짧아지고 고름은 길어졌으며 저고리는 옥양목에 물을 들이기 시작했고 겨울용에는 안감에 융을 덧댄 것이 특징. 이때부터 보글보글한 퍼머머리가 처음으로 선보였고 신발은 단화에 짧은 목양말(삭스)을 신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김현옥작)는 저고리길이가 예전에 비해 10㎝나 길어지고 끈이 있는 단화에 고름대신 브로치를 달기 시작했고 스타킹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머리는 안으로 구부린 우찌마끼나 겉으로 구부린 소도마끼. 『유행』이란 용어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50년대에 이르면 한복의 개성시대에 접어들어 소재도 양단과 남자양복지를 겸용했고 물빨래가 가능한 옷감을 사용해 실용성을 크게 높인 것이 특징. 머리와 신발 또한 다양해졌고 70년대에 이르면 박스형 치마가 A형으로 바뀌고 화려한 금박·은박이 유행됐다. <육상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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