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미도파 백화점을 나와 약 15미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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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장욱(1968~ ), '미도파 백화점을 나와 약 15미터'

1

아지랑이, 바람이 쓸어가는 저 나른한 수평선

내 가 왜 이곳에 있을까, 아니 여기는 어딜까 나는

미도파 백화점을 나와 약간 어지러워 고개를 저었으므로

지중해, 혹은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에

당도한 것일까, 먼데 하늘을 가르는 갈매기

갈매기, 저 갈매기, 끼룩끼룩 울며 나 여기 왔으니

그대는 한 통 편지라도 써주겠지, 지중해

혹은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는 평화로워

그대도 끼룩끼룩 울며 이곳으로 날아오라고

나는 답장을 쓰겠지, 그런데 여기는 어딜까

2

여기는 어딜까, 해변에 앉아 저무는 물빛을 보네

바람에 나부끼듯 필사적일 수 있었다면

그곳을 떠나진 않았을 거야, 아지랑이

아지랑이 같은 사랑에 나는 너무 오래 속아왔네

오늘밤엔 먼 바다의 오징어떼가 꿈꾸듯 밀려올 텐데

어느덧 나는 멀어져 가는 파도 쪽으로 달려가

찢어진 그물을 빠져나가는 오징어떼 오징어떼

바라보겠네 지중해, 혹은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의 밤

나는 푸릇푸릇 웃으며 중얼거리네 그런데 여기는,

여기는 도대체 어딜까

3

이건 블랙 코메디야, 누군가의 웃음이 먼 해안에 머무는

지중해, 혹은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의 밤은 흘러만 가네

너무 멀리 떠나온 걸까, 해변의 모래들 우우

노래하는 지중해, 혹은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의 밤

오징어떼는 떠나고 나는 천천히 그물을 거두네

하지만 그대 꿈을 꿀 수 있을까 새벽이 올 때까지

끼룩끼룩 울며 혼자 모래밭을 헤매었으니

단 한통의 편지도 나는 띄우지 못했던 것이네, 지중해

푸에르토 에스콘디도의 밤은 흘러만 가지

그런데 여기는, 여기는 도대체 어딜까



출발지와 목적지만 있을 뿐 몽상이나 반역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길의 중간에서는 누구도 멈추지 않는다. 갈매기도, 지중해도 보이지 않는다. 길 위에서 우리는 실종자다. 해변의 밤은 나 하나쯤 사라져도 실종자들로 들끓는다.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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