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노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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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 KIA에서 뛴 호라시오 라미레즈(36)는 메이저리그 169경기에 등판해 40승 35패, 평균자책점 4.65를 기록한 투수다. 빅리그에서 8시즌이나 뛰었으면서도 한국야구를 이해하려 애썼다고 한다.

시즌에 앞서 메이저리그 전문가 송재우 해설위원이 라미레즈에게 말했다. "한국 타자들의 세리머니가 과하다고 느낄 수 있다. 나쁜 의도가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순간 라미레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런가? 그건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 국내 타자들과 상대하기 전부터 그는 세리머니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부상 탓에 두 달 만에 KIA를 떠나 별 탈이 없었지만 말이다.

2011년 8월 2일 KIA 투수 트래비스 브랙클리는 홈런을 치고 다이아몬드를 도는 두산 양의지를 향해 "너무 천천히 뛴다"고 소리쳤다. 김민호 두산 주루코치까지 가세해 언쟁이 붙었다. 2012년 7월 3일 두산 투수 스캇 프록터는 KIA 타자 나지완의 머리 위로 공을 던져 싸움을 일으켰다. 앞서 5월 30일 나지완이 프록터의 공을 때린 뒤 홈런인 줄 알고 두 손을 번쩍 든 것에 대한 응징으로 보였다.
프로야구에서 외국인 선수가 활약한 지 올해로 18년이 됐다. 서로 교류하고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 그러나 좀처럼 줄어들지 않은 간극도 있다. 한국 타자와 외국인 투수의 세리머니 신경전이다.

지난 22일 부산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LG 선발 루카스 하렐이 롯데 최준석을 삼진으로 잡은 뒤 하늘을 쳐다보며 왼손을 뻗은 뒤 오른손으로 툭툭 쳤다. 최준석이 홈런을 쳤을 때의 세리머니를 재현한 것이다. 조롱당했다고 생각한 최준석은 더그아웃에서 불같이 화를 냈다. LG 동료들은 루카스에게 "최준석의 세리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루카스는 다음 타석 때 모자를 벗어 최준석에게 미안함을 전했고, 이튿날 양상문 LG 감독과 함께 롯데 더그아웃을 찾아 또 사과했다.

이 장면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길 수는 없다. 최준석의 세리머니에 대한 사연을 전해 듣지 않았더라면 루카스는 사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롱을 조롱으로 맞받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다툼은 언제든지 또 일어날 수 있다.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홈런(762개)을 때린 배리 본즈(51)는 홈 플레이트를 밟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빅리그 선수들은 "본즈 정도 되면 인정해야지"라면서도 속으로 거만한 그를 미워했다. 본즈처럼 특별한 타자가 아니라면, 끝내기 홈런처럼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세리머니를 자제한다. 홈런을 친 뒤엔 재빨리 다이아몬드를 돌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간다. 가뜩이나 열패감에 빠진 투수를 세리머니로 한 번 더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들의 불문율(unwritten law)이다.

자기들 벤치 앞에서 LA 다저스 선수들이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NC 에릭 테임즈가 요란한 '수염 세리머니'를 하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좌절한 상대 앞에서는 자신의 쾌감을 잠시 감추는 게 패자에 대한 존중이라고 메이저리그는 믿는다. 한국야구에는 본즈보다 과한 세리머니를 하는 타자들이 많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미국야구에서 뛴 선수들은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

홈런 세리머니를 둘러싼 갈등은 재발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빈볼 시비와 잦은 투수교체 논란에서 보듯, 메이저리그 불문율을 국내 팀들이 각자 다르게 해석하면서 소모적인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야구가 메이저리그를 꼭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의 문제라면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굳이 세리머니를 하지 않아도 홈런은 그 자체로 충분히 즐겁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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