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문화 정체성 살려야 경제도 살아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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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태권
광주요 회장

광복 70년이 된 현재까지도 국내는 일부 기득권 세력의 부패로 인한 비리 스캔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공무원 사회는 개혁을 뒤로한 채 복지부동이 만연하고, 정치권과 정부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친 지 오래다. 법질서는 힘의 논리에 밀려 균형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리고 있다. 전도(顚倒)된 가치관을 바로잡아야 할 지식인들도 결과 없는 논쟁만 일삼을 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는 이런 한국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동북아 주변 정세는 미국·러시아·중국·일본을 축으로 한 긴박한 대결구도로 마치 120년 전 구한말 상황처럼 흘러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일본·중국과 과거사 문제와 영토분쟁, 한반도 통일 문제, 제조업 산업의 한계 등으로 내외적으로 다 비상 상태다. 일본은 굴기하고 있는 중국을 겨냥해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과 연대한 중국 견제 대열에 우리의 동참을 강요하고 있다. 중국은 또 어떠한가? 중국은 북한이라는 지렛대를 활용해 미국 일변도의 안보정책에 대한 우리의 변화를 압박하고 있다.

 구한말, 부패한 양반계급의 전횡과 세계정세에 무지했던 정치권의 무능력 때문에 우리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쓰라린 경험이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지금 우리의 모습이 왠지 구한말의 그 혼란스러웠던 기억과 겹쳐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조지 오웰은 그의 저서 『1984년』을 통해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고 했다. 이는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지금 우리의 군사·경제적 역량으로는 날이 갈수록 더 막강해지고 있는 이웃 나라들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다. 힘을 앞세운 그들은 과거의 역사마저 부정하며 우리의 숨통을 옥죄고 있다. 그들로부터 암묵적 무시를 당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새뮤얼 헌팅턴은 앞으로의 세계 질서는 문화적 동질성의 정도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국가들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상대를 선택해 거래하고, 비슷한 성향끼리 뭉쳐서 국제적·지역적 결사체를 만들어 주권을 위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예견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일본은 2020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자국을 문화적 강국으로 만들고, 관광대국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민족과 종교를 뛰어넘는 관광 정책을 수립하고 있는 일본에 이어 중국 또한 최근 ‘신형(新型) 국제관계’란 신조어를 내걸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의 건설을 통해 새로운 국제 질서의 중심국가로 굴기하겠다는 야망을 펼치고 있다. 이는 군사·경제 중심의 20세기 패러다임에서 한 단계 나아가 문화로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식민지 시기로부터 잉태된 부정적 사고와 습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갈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 첫 번째가 바로 문화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문제다. 광복 이후 우리는 고속성장의 물질적 성과에 취해 상대적으로 문화를 등한시했다. 먹고살기 각박했던 생활 속에서 문화생활이란 사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풍토 속에 우리의 생활은 오로지 ‘일·일·일’이 되었다. 우리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의해 훼손된 우리 문화를 복원하고 발전시키는 데도 무관심했다. 전통은 단지 옛것으로 치부돼 밀려나고 실생활과 동떨어진 유물처럼 취급되곤 했다. 전통문화의 훼손 또는 소멸에 따르는 후유증은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문화 정체성은 한낱 말뿐인 구호에 그치게 되고 그 실체마저 애매모호하게 흐려졌다.

 그러나 이제 경제적으로 웬만큼 성장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문화 정체성이다. 국민 스스로가 대한민국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경제적 경쟁력도 소생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한국의 전통 생활 문화와 지역 문화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결합한 21세기 한국형 복합문화시설공간의 구축을 제안한다. 현재 전국에는 229개의 문화원이 존재한다. 이 문화원들을 거점으로 삼아 한국의 전통과 지역별 문화산업의 발전전략을 실체화하고, 실현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이런 문화 거점을 통해 우리 문화와 전통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그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물론 이런 큰 계획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다. 먼저 시범적으로 한 곳의 문화원을 선정해 그것의 성패를 모델 삼아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좋다. 체계적인 방안을 통해 21세기형 전통문화를 새롭게 형성하고 문화의 주체인 시민들이 그 중심에 서도록 해보자는 말이다. 이와 같은 노력은 지금 당장의 결실을 위한 것이 아니라 15년 후,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깊은 지하의 물을 길어 올리듯 기적 또한 작은 출발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며 연구하는 긍정적 개인들의 힘을 모아 우리는 ‘대한민국의 문화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조태권 광주요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