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낭자 암흑가에도 사랑의 꽃은 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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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호 30면

무뢰한. 이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사람. 직업이 없이 불량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 과연 이들만을 콕찝어 무뢰한이라 일컬을 수는 있을까. 영화 ‘무뢰한’ 속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수많은 무뢰한이 등장한다. 텐프로 출신 마담 혜경(전도연) 곁을 맴도는 이들은 애인을 담보 삼아 돈을 빌려가는 준길(박성웅)이나 보스와 형님의 여자를 호시탐탐 노리는 영기(김민재) 등 누구 하나 호락호락한 인물이 없다. 그래서 혜경은 어디서 들어올지 모르는 공격에 늘 허리를 곧게 세운다. 허나 준길이 홧김에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길에 오르자 그녀를 향한 공격도, 이를 받아치는 방어도 한층 더 수위가 높아진다.

영화 ‘무뢰한’

그런 그녀 곁에 새로운 존재가 등장한다. 혜경이 일하는 마카오 단란주점에 영업부장으로 위장 잠입한 형사 재곤(김남길)이 바로 그다. 재곤은 원래 천성이 사냥꾼이었다. 일단 목표가 설정되고 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고 수단과 방법 따윈 개의치 않는 직진파였다. 하지만 혜경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차 속에서 도청을 하다보니 그녀가 밥을 먹는 시간에 그도 식사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면 내용물을 확인하고, 심지어 준길과 관계를 나누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둘 사이의 관계도 변해간다. 어두침침한 무채색의 화면에서 혜경의 빨간 구두와 빨간 원피스만이 색을 발하는 것처럼 재곤의 눈길은 점점 더 혜경만을 좇는다. 그녀가 사인지를 들고 밀린 술값을 받아내러 갈 때면 든든한 보디가드로 분하고, 사는 게 팍팍해 선지국에 소주를 들이킬 때면 술친구가 되어준다. ‘이 바닥 10년에 빚만 5억’이라는 혜경의 속사정을 알아갈수록 더이상 그녀는 ‘살인자의 여자’가 아닌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지켜내야만 하는 ‘약점’이 되어가는 것이다. 재곤이 형사로서 가장 두려워했던 ‘범죄자와 구분되지 않는 순간’을 맞닥뜨린 셈이다.

영화는 사건과 인물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왜 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인물들이 어떠한 사연을 품고 살아왔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대신 철저하게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 데뷔작 ‘킬리만자로’(2000) 이후 15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오승욱 감독은 “사건을 멋지게 찍는 감독은 많다”며 “나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혹은 그 이후의 시간을 늘려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왜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는지,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어떤 감정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내는지에 주목했다는 설명이다.

다행히 감독의 작전은 주효한 듯 하다. 배우 전도연은 몸의 세포 하나 하나까지 활용해 감정을 전달한다. 떨리는 눈동자는 그녀가 지금 누굴 바라보고 있는지, 찰지게 잡채를 무치는 손은 그녀가 현재 어떤 마음인지를 굳이 대사가 없어도 될 만큼 완벽하게 이해하게 만든다. 김남길은 상대방의 변화를 리트머스지처럼 자연스럽게 흡수한다. 때로 살벌하고 때로 자상한, 실시간으로 변하는 표정 덕에 과연 다음은 무엇일까 하는 기대감마저 든다고나 할까. “시나리오가 생선 가시라면 거기에 핏줄을 입히고 살을 오르게 한 다음 비늘과 지느러미를 만들어 헤엄쳐 나가게 하는 건 배우의 역할”이라는 오 감독의 칭찬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제68회 칸 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칸의 여왕’이란 수식어를 들먹거리지 않아도 이제 우리는 그녀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말이다.

피로 낭자한 가운데서도 사랑이 꽃피는 하드보일드 멜로지만 영화는 쉽지 않은 질문들을 던진다. 죄를 가운데 두고 대치하는 범죄자와 형사의 팽팽한 기싸움이 이어질 때 일어나는 많은 범법행위는 과연 죄인가 아닌가. 상처 위의 상처, 더러운 기억 위의 더러운 기억이 쌓여갈 때 기존 연인이 아닌 새로운 사랑을 좇는 것은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 여기에 과연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까지. 허나 너무 겁먹진 말자. 이 역시 즉답을 요하는 문제는 아닐테니 말이다. 시간을 들여 곰곰이 곱씹어 보자.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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