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산문집 들고 돌아온 소설가 오정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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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사진=김태성 기자]

소설가 오정희씨가 예순을 한 해 앞두고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황금부엉이)를 펴냈다. 2000년께부터 적어놓은 짧은 글 24편을 엮었다. 신변잡기를 그러모았다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다. 하나 이번 산문집은 소중하다. 오정희란 이름이 박힌 책은 10년 만에 처음이다.

원체 과작(寡作)인 작가였다. 1968년 21세 나이로 등단한 이래 소설 6권 냈을 뿐이다. 작가로서 39해째를 맞이하지만 산문집은 이번이 두 번째다. 더욱이 작가는 '문학과 사회'에 장편 '목련꽃 피는 날'을 연재하던 2004년 봄 갑자기 집필을 중단했다. 억측이 분분했으나 작가는 말을 아꼈다.

과작이 꼭 자랑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오정희라면 다르다. 단언컨대 그는 이 시대 문학청년의 전범(典範)이다. 그들은 밤새 오정희를 읽었고, 밤새 오정희를 필사했다. 여기서 오정희라고 부른 건, '중국인 거리' '저녁의 게임' '유년의 뜰' 등등 대표작 대부분이 베껴야 할 목록이었기 때문이다. 오정희로 말미암아 잠 못 이룬 청춘 중엔 훗날 소설을 쓰게 된 신경숙도 있었고, 공지영.최영미.강영숙.조경란 등도 있었다. 신경숙은 자전적 소설 '외딴 방'(1995)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도 그처럼 되리라, 생각했다. 아름다운 그 사람 옆으로 가기 위해 나도 아름다워지리라.…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를 흠모하는 내 마음이 그에게로 섣불리 갈 수 없는 연유가 되었다. …어느 시절엔 그를 약탈하려 덤볐던 적도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서슴지 않고 그를 빼앗아오고 싶었다.'

오정희에 열광한 여러 이유 중에 단연 꼽히는 건 특유의 문체다. 처음엔 건조했는데 다시 읽으면 물기가 묻어났다. 섬뜩했다 아련했고, 통렬했다 가슴 저몄다. 문장은 시처럼 날이 섰다. 오정희를 관통하는 주제였던 부조리한 삶은 사실 문장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시절 문학청년의 습작노트마다 이런 구절들, 새겨있었다.

'비듬처럼 떨어져 내리는 햇살' '유리 목걸이에 햇빛이 갖가지 빛깔로 쟁강쟁강 튀었다'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는 동네'.

내공은 여전했다. 산문집 곳곳에서 오정희는 오롯했다. '스무 살은 다른 세상을 향해 열리는 문이었다' '서른 살이 되는 아침의 심정은 착잡했다' '마흔 살이란 앞만 보고 달려온 걸음 앞의 커다란 걸림돌이다'라며 차분히 세월을 되돌아봤을 때 더욱 그랬다.

그래도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소설 쓰기, 소설 짓기'란 장이다. 작가는 10대 때 일기를 들추며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작업 중인 소설의 부분을 인용해놓고, 이렇게도 고쳐보고 저렇게도 바꿔보는 고민의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른바 오정희의 창작노트인 셈이다. 여기서 알게 된 건, 글쓰기를 걱정하는 대(大)작가의 고뇌가 문학청년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작가는 "내게 소설과 삶은 서로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작가는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68년 "가능하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소설을 발표할 것이며 청탁받고 글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79년 이상문학상을 받았을 땐 "내가 문학에서 나를 아낀다면 그것은 나를 아끼는 게 아니라 나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 각진 각오를 밝혔다. 그리고 오늘 산문집에선 이렇게 적었다.

'글쓰기란 결국 빤히 보이는 자기 한계, 재능 없음, 포기하고 싶은 유혹과의 싸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한숨을 내쉬지만 그래도 이제야 아주 조금씩 소설 속으로 배밀이하여 들어가는 모양이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지만 그래도 굼뜬 벌레들이 맨몸으로 땅을 기며 낸 흔적이 미미하게 남았다.'

작가는 중단했던 '목련꽃 피는 날'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아직도 글쓰기는 두렵지만 지금은 많이 추스렀다며, 이르면 올 상반기 발표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렇게 되길 빈다. 무언가 베껴본 지, 너무 오래됐다.

글=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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