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혼의 한인 1.5세가 역사를 만들다

미주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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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류 당선자가 승리를 확정짓자 선거 캠프에 모인 UCLA 동문이 티셔츠를 선물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데이비드 류는 6살 때인 1980년 부모를 따라 이민 온 1.5세들의 전형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부모의 의지에 따른 미국행이었고, 인종·경제적 어려움을 맨몸으로 극복해야 했다. 그래서 그의 성장기에는 그 시대 삶의 모습이 묻어나고 '맨손 투혼'의 의지도 엿보인다.

부모님은 한국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한 교사와 간호사였다. 하지만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LA 정착을 결심했다. 여섯 살 장남(데이비드)을 포함, 올망졸망한 3남매와 함께.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더 거칠었다. 교사, 간호사라는 명함은 태평양을 건너며 빛이 바랬고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아버지는 시큐리티가드와 열쇠일 등으로, 어머니는 홈헬스케어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주로 야간 근무를 했던 어머니는 항상 3남매가 걱정이었고, 얼마 후 외할머니의 합류로 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렇게 여섯 식구는 LA한인타운 인근 700스퀘어피트 규모의 투베드룸 아파트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키웠다. 학교에서 무료점심을 먹고, 푸드스탬프를 받는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시절이다. 지역 특성상 동네 친구 대부분은 히스패닉이었고 한인은 물론 아시아계조차 드물었다.

하지만 다른 한인들처럼 부모님의 교육열은 남달랐고 장남이 의사가 되길 원했다. 타운 인근 존 버로우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이스트LA 지역의 프란시스코 브라보 메디칼 매그닛 고교에 진학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의대 진학을 염두에 두고 UCLA 재학 시절 전공 역시 생물학을 택했다.

그러다 3학년 때 '삐딱선'을 탔다. 공부도 힘들었지만 적성과도 맞지 않았다. 부모님께 과감히 '의대 진학 포기'를 선언하고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부모님은 소수계 이민자가 차별받지 않으려면 전문직에 종사해야 한다고 만류했지만 결국 장남의 선택을 존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부터 그의 행동반경은 넓어졌다. UCLA한인학생회장을 하고 한미연합회(KAC)에도 참여했다.

대학 졸업 후엔 아예 KAC에 합류해 2만 명의 시민권 취득을 도왔고 시민권 취득 수수료 인상 반대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그렇게 차츰 누군가를 돕는 일에 빠져들었고 UN(국제연합)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꿈을 키우기도 했다.

20대 후반 시작한 이반 버크 전 LA카운티 수퍼바이저의 보좌관 일은 그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5분 인터뷰'로 발탁된 그가 맡은 일은 사회복지 관련 업무. 지역 내 포스터홈과 봉사단체 지원 등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정치인은 나쁜 사람'이라는 편견이 깨진 것도 이때다. '예산과 권한'이라는 무기가 얼마든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때 정치란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버크 수퍼바이저를 대신해 참석했던 한 마약중독치료센터 수료식에서의 경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0대 초반 소녀의 '엄마를 치료해줘서 고맙다'는 말. 그렇게 2년만 하자고 시작했던 일이 6년으로 늘어났고, 그 후에는 사우스센트럴 LA지역 커드렌 정신병원의 정부담당 디렉터이자 대변인으로 횔동했다.

정치인은 '시민들의 공복(public servant)'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버크 전 수퍼바이저의 겸손, 필립 버튼 전 연방하원의원의 용기, 존 챙 가주 재무장관의 친화력을 닮고 싶다고 했다.

김동필·원용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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