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 히트 친 '길재경 묘비사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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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주간 중앙일보에서 가장 '빛나는' 보도는 5월 19일자 1면 '美 망명설 北 길재경 3년 전 숨졌다'는 제하 기사의 묘비 사진이다.

이틀 전 연합뉴스가 김정일 총비서 서기실 부부장 길재경 등 3명이 제3국에서 미국으로 망명을 요청했다고 보도하자 국내 여러 방송.신문이 이를 받아 보도했다.

18일 그와 함께 망명했다고 보도된 사람이 망명설을 부인하며 길씨는 이미 죽어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들의 망명설도, 길씨가 죽었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이러한 혼선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바로 길부부장이 2000년 6월 7일에 죽었음을 보여준 중앙일보의 묘비 사진이었다.

*** 가판 안내며 타지 가판 베끼나

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제시되자 연합뉴스를 비롯해 여러 신문.방송이 중앙일보 사진을 근거로 잇따른 정정.사과 보도를 냈다. 그야말로 깨끗한 특종이었다.

지난 2월 17일 남북 역사학자 공동학술토론회 취재차 방북했던 기자가 애국열사릉을 방문하는 기회에 5백71기의 묘비를 모조리 찍어온 자료수집 정신이 거둔 성과였다.

반면 20일자 중앙일보 2면 '전두환씨 10대 손자.손녀 수십억원대 부동산 소유' 제하의 기사는 한겨레의 같은 날 가판 단독기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全씨가 현금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고 재판부에 제시해 물의를 빚은 상황이기 때문에 이 기사는 시의에 맞는 보도임에 틀림없다. 또한 타지 기사를 자사 기자가 취재한 것처럼 표절하는 것보다는 타지를 인용해 베끼는 것이 백번 나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全씨에게는 피해를 주는 내용이고, 더구나 발생기사처럼 한시가 급한 내용도 아닌데 독자적인 확인이나 반론 취재 노력 없이 베끼기부터 하는 게 옳은 것인지는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더구나 남의 가판을 서로 베껴 붕어빵 신문이 양산되는 우리 언론 상황을 한 차원 높이기 위해 가판을 폐지한 중앙일보가 타지 가판을 확인 절차 없이 시내판에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노무현 대통령이 광주 5.18 묘소 참배시 한총련 시위대에 막혀 뒷문으로 출입한 해프닝은 여운이 오래 간 관심사였다.

19일자 조간에는 일제히 1면의 큰 기사로 盧대통령이 뒷문으로 입장.퇴장했다는 사실이 보도됐고, 20일자 1면에는 난동자를 엄벌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크게 실렸다.

특히 몇몇 타지는 20일 묘소 해프닝 속보를 통해 대통령이 입장시에는 군중 사이로 후문을 걸어서 통과할 수밖에 없었고, 퇴장시에는 전용차를 못타고 경호원용 승합차로 빠져나간 스케치 기사에 대통령의 추모 화환이 짓밟혀 나뒹구는 SBS 화면 사진을 곁들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중앙일보는 5.18 묘소 해프닝의 이런 후속 상보도, 방송에 다 나간 화환 사진도 보이지 않았다.

*** '장관들 시위' 문제점 짚었어야

새 정부의 심각한 문제점 중 하나는 국정 책임자들이 자기 직무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안돼 있다는 점이다. 환경부 장관과 해양수산부 장관이 새만금사업 중단 요구 시위에 참가한 것이 그 좋은 예다.

이 두 장관은 개인적으로나 기관의 입장에서 새만금사업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질 만도 하다. 그러나 그 반대를 표명하는 방법은 국무회의, 관계 부처 간 협의과정에서의 의견 개진이어야지 반대 시위에 직접 나서는 것은 국무위원임을 몰각한 행위다.

그러나 이들의 시위 참가 사진을 게재해 문제를 극명하게 제기한 것은 중앙일보가 아니라 경쟁지 21일자 1면이었다.

KBS 정연주 사장은 지난해 한겨레의 칼럼에서 이회창.장상씨의 아들 병역면제와 미 국적 취득을 비판했다. 그런데 뒤에 자기 두 아들도 미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드러나 그 비판이 부메랑이 돼 되돌아왔다.

24일자 경쟁지들은 鄭사장이 아들뿐 아니라 스스로도 병역면제를 받아 3부자가 모두 병역 미필자라고 폭로.비판하는 성명을 각각 2면에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두 아들의 미 국적 취득사실에 이어 이번 鄭사장 자신의 병역면제 사실도 연거푸 보도하지 않았다.

성병욱 중앙일보 고문.세종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