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노 대통령의 잘못된 역사인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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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은 현실과 미래를 올바로 조망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역사에 대한 노 대통령의 남다른 관심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세종과 정조시대 개혁이 실패했다고 보는 역사인식은 전근대적 영웅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실상을 보자면 세종과 정조 사후 진보적 학자들 중 일부가 축출되었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 개혁적 흐름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세종 사후 한글은 점차 실용화되고 널리 보급돼 오늘날 민족문화의 토대가 되기에 이른다. 정조가 '병사'한 이후 5년 만에 정조가 키운 세력이 보수적 벽파를 '일망타진'하여 북학과 서학의 진보적 흐름은 대세를 이루었고 오늘 우리 시대의 문화는 그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세종과 정조시대의 개혁적 지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긴 파장을 이어 나간 것은 그것이 역사의 발전 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설사 '영웅'이 중도에 스러진다 해도 역사 발전이 중단되지 않았던 것은 역사가 어떤 한 사람의 '영웅'에 의해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역사 속 개혁의 좌절에 낙담해 개혁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는 오늘의 개혁이 역사의 발전 방향에 합치하는 것인지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정조시대에 대한 역사인식의 오류가 낳은 오늘의 심각한 문제들을 살펴보자. 200년 전 수원의 화성신도시에서는 정조와 실학자들의 진보적 구상이 광범위하게 실천됐다. 화성 성곽과 선진적 도시기반시설들, 국영시범농장과 대규모 수리시설, 선진적 상업시설은 이 시대가 추구했던 개혁의 방향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일제의 왜곡을 답습한 우리는 화성신도시의 울타리에 불과한 성곽만을 문화재로 지정한 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으며, 주먹구구식 문화재 보존사업으로 화성신도시의 선진적 시설물들을 무차별적으로 훼손하고 있다. 1996년 화성건설 200주년에 만석거저수지와 서호저수지를 수백억원을 들여 매립했으며, 이제는 화성 성곽을 '성역화'한다는 미명 아래 1조 수천억원을 쏟아붓는 무모한 개발 계획과 특별법안이 여당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조시대 선진 농업의 터전에 자리잡았던 서울대 농생대와 수의대는 그 보호의 책임을 방기한 채 서울로 떠났고, 농촌진흥청 역시 200년 전통과 농촌 진흥의 터전을 내버린 채 전라도로 옮겨가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일제가 권업모범장을 설치해 우리 농촌 침탈을 본격화한 1906년을 한국 근대농업의 시발점이라 하여 농림부와 농촌진흥청이 수십억원의 예산으로 올해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공직자와 지도층 인사들의 전도된 역사인식과 현실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거의 역사를 중시하면서 현재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는 노 대통령의 지향성은 옛 것을 모범으로 새로운 것을 창안한다는 정조시대의 '법고창신(法古創新)'론에 견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실제적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여 역사 발전에 부합하는 참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법고창신'은 '실사구시(實事求是)'와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 대통령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에서의 오류를 바로잡고 오늘의 개혁을 안착시켜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유봉학 한신대 교수·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