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멜로 영화 '사랑을 놓치다' 주연 설경구&송윤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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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사진=박종근 기자 ]

'설경구와 멜로'라는 낯선 조합을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단정한 재킷 차림으로 약속장소에 들어왔다. 끼니를 놓친 그는 탁자 위의 김밥과 만두를 집어먹으며 휴대전화로 뭔가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여느 사람에게 지극히 일상적인 그 장면의 주어가 '설경구'라니, 퍽 낯설다.
'박하사탕' 이래 스크린 속의 그는 대개 눈에 핏발이 서도록 강렬한 인물들로 기억됐다. 그렇구나. 이물감을 느끼게 한 실체는 '멜로'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예산이 큰 영화를 많이 했죠. 그러고 나니까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자꾸 생각이 나데요. 그리워했다고나 할까요. 디테일이 주가 되는 작은 영화, 살아가는 일상을 그리는 영화를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박한 일상의 멜로 '사랑을 놓치다'(19일 개봉.감독 추창민)를 선택한 설경구(38)를 함께 주연을 맡은 송윤아(32)와 만났다.

"멜로요? '오아시스'도 멜로였잖아요, 개성 강한 멜로. 근데 '너는 내 운명'은 멜로라고 하고, '오아시스'는 그렇게 생각 안 하더라고요. 같은 조건인데. 아니, 서로 보듬어주고, 다독여주고, 청계고가에서 안고 춤까지 추는 그런 대단한 멜로가 어디 또 있어요?"

그의 이어진 주장대로라면 '박하사탕'도 결국은 첫사랑의 얘기였고, 초기작인 '처녀들의 저녁식사' 역시 멜로였다. 송윤아가 거든다. "선입견인 것 같아요. 멜로라고 하면 왠지 멋진 남자, 멋진 여자가 나오고, 배경 그림도 예뻐야한다는."

'사랑을 놓치다'는 그런 선입견을 비껴가는 얘기다. 대학시절부터 조정선수 우재(설경구)를 짝사랑한 현재의 수의사 연수(송윤아)가 다시 만나 참으로 일상적인, 그래서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는 사랑을 이어간다. 사실 우재는 연수처럼 예쁘장한 여자가 10년 세월을 두고 마음에 품어둘만큼 멋진 남자인지 의심스럽다. 사는 모습에서는 독신남 냄새가 풀풀 나고, 직장도 불안정하며, 딱히 다정한 구석도 없다.

이런 남자 때문에 속앓이 하는 연수의 감정을 송윤아는 섬세한 표정연기에 담아낸다.

"감히 말씀드리지만, 제가 이 나이 먹도록 살아보니까, 사랑이라는 건 그런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남들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는 남자라도, 그 남자의 말 한마디에 웃고, 울고, 때로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여기는 게 사랑이죠." 송윤아의 설명이다.

그렇다고 우재가 영 매력이 없지는 않다. 연수가 잠시 맡기고 간 개 '삼월이'에게 라면 국물로 밥을 말아준 뒤 소파 위에 뒹굴면서 독백 반 대화 반 쏟아내는 장면처럼, 의뭉스러운 유머감각이 곁들여진다. '설경구와 코미디'라는, 역시나 선뜻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 제법 자연스럽다. 이처럼 코미디와 소통하는 설경구, 감성연기로 호소력을 발휘하는 송윤아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은 흥미롭지만, 영화는 이보다 큰 아쉬움을 준다. 관객의 예상을 반 보쯤 앞서가는 대사를 통해 곳곳에 등장하는 웃음은 강력한 극의 흐름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잔재미에 머물고 만다.

송윤아의 말을 빌리면, 설경구는 "불성실한 배우"다. "리허설도, 대사암기도 열심히 안 해요. 근데 막상 카메라만 돌아가면 혼이 담긴 것처럼 연기해요." 설경구의 해명성 발언을 들어보자. "반복을 하면 익숙해지니까요. 인물에 익숙해지면 진심이 아니라 대사를 그냥 되뇌는 느낌이에요." 이런 방식의 연기에 익숙한 그와 이번 영화의 궁합이 썩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설경구는 "미리 정해진 앵글 속에 배우가 자리를 잡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돌이킨다.

그는 대신 "이휘향 선배를 만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꼽았다. 연수의 홀어머니이자, 양어장을 꾸려가는 시골 아낙네로 등장하는 이휘향은 동네 아저씨(장항선)와 뒤늦은 사랑에 달뜬 표정을 여름볕에 새카맣게 탄 얼굴 위에 진솔하게 그려낸다. "현장에서 그러시대요. 이 대자연 앞에서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게 참 힘들다고요. 그러면서 누구보다 먼저 현장에 와서 극중의 공간에 익숙해지려고 하고, 촬영 기간 내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정말 시골 아줌마 같은 모습으로 지내려고 하셨죠."

연수 엄마의 에피소드는 선남선녀의 사랑이 멜로의 전부는 아니라고 역설하는 이 영화의 시각을 설명하는 데 요긴하다. 송윤아는 "돌아보니 우리 영화의 모든 인물이 사랑을 하고 있더라"고 지적한다. 설경구의 말을 곁들인다. "김광석 노래를 좋아했는데, 죽던 해 라이브공연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예순 살이 되면 뭘 할까, 연애를 하고 싶다고요. 현장에서 감독님과 세대별로 사랑이 뭐가 다를까 한참 토론을 한 적이 있어요. 결론은 이랬죠. 마찬가지다. 남들 보기에 어떻든, 당사자들에게는 절실하다는 점에서."

글=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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