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4. 첫 기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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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필자의 첫 기타는 직접 만든 장난감 악기였다. 사진은 최고급 전자 기타에 둘러싸여 있는 필자의 모습.

아버지에게 남자다움과 살아가는 자세를 배웠다면 어머니에게선 음감과 예술적 감각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음악을 좋아했고 그림도 잘 그리셨다. 내 어릴 적엔 주변이 온통 음악이었다.

우리 민족은 가난했지만 여흥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멋들어지게 품바타령.장타령을 하는 각설이를 쫓아다니곤 했다. 당시 각설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공연 한 자락 보여주고 당당하게 대가를 받았다. 걸인이 아니라 일종의 직업 예술인이었던 셈이다. 농부들의 타령도 운치가 있었다. 농부는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단순 노동자가 아니라 풍류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농부의 타령은 풍년에 대한 인간의 바람을 담은 토속 예술이었다. 그걸 듣노라면 가을 논에서 황금이 쏟아지는 듯한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그 장단과 가락이 내 음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고백한다. 요즘은 물질적으론 풍요로워졌지만 그 시절의 멋과 풍류.여유가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노래란 노래는 다 따라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찼다. 어머니가 보여주신 바이올린과 기타 사진이 눈에 삼삼했다.

"이건 나무를 깎은 뒤 줄을 매달아 만든 악기야. 통 속에서 무척 아름다운 울림이 난단다."

과연 소리가 날까 궁금했다. 악기라곤 구경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나무 상자를 주웠다. 군 통신용 전화선도 구했다. 전화선 안에는 철사가 일곱 가닥씩 들어 있었다. 세 개는 가는 선이고, 네 개는 강철이었다. 강철만 골라내 모두 일곱 줄을 만들었다. 나무통 양쪽 끝에 못을 박아 철사를 맨 다음 나무를 깎아 위치를 조금씩 바꿔 받침대를 세웠다. '도레미파솔라시' 일곱 음계가 나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음을 조율하는 데 며칠이나 걸렸다. 대나무를 얇게 쪼개 만든 피크로 줄을 퉁기면 고운 소리가 났다. 내 첫 기타는 그렇게 태어났다.

학교에 가지고 가서 동요를 연주하면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몰려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학교에 악기라곤 낡고 고장 난 풍금 한 대밖에 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철사를 몇 개 더 걸어 더 멋있게 할 걸, 왜 일곱 줄만 걸었는지 아쉽다. 더 높은 음을 만들려면 철사를 못에 걸고 팽팽하게 묶어야 하는데, 아마 어린 손힘으로는 줄을 매는 데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서울 생활이 안정되려는데 또 짐을 싸야 했다. 아버지가 어디선가 전쟁이 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전쟁이 난답니다. 함께 고향으로 내려갑시다."

아버지는 친척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전쟁이 터지기 1년 전인 1949년, 국민학교 3학년 때 우리 가족은 고모가 살고 있던 충북 진천 백곡면 산골짝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아버지는 친척들에게 "그러게 내가 전쟁이 난다고 했잖소"라며 큰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시골이라도 전쟁의 어려움을 피해갈 순 없었다. 게다가 예기치 못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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