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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정상회의 비관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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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러나 지정학적 이해와 역사적 분규로 얽힌 각국 관계는 이 같은 목표 실현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제1회 EAS는 공동의 연대를 창출하기보다는 해묵은 국가 간 마찰을 부각시켰고, 아시아의 작은 국가들엔 어느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EAS는 12월 중순 중국.인도.일본.한국.호주.뉴질랜드, 그리고 아세안 국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지난해 아세안+3(한.중.일) 회담에서 압둘라 바다위 말레이시아 총리가 EAC 구상을 밝혔고 이는 곧바로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지지를 얻었다. 중국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바쁜 틈을 이용, 동남아를 중국이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와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베이징(北京)의 계획은 동남아 국가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아세안은 미래의 어떤 EAC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입장을 정하고 인도와 호주.뉴질랜드 등을 끌어들였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중국은 정상회의 전날 밤 EAS 회원국을 핵심 그룹과 주변 그룹으로 나누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향후 아시아 공동체 건설의 주역은 16개 EAS 회원국 모두가 아닌, 현재의 '아세안+3'(APT)가 돼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이처럼 EAS를 APT 멤버로 구성되는 핵심 그룹과 인도.호주.뉴질랜드 등이 주축이 된 주변 그룹으로 분류하자는 중국의 제안은 커다란 분기를 야기시켰다.

중국 인민일보는 논평을 통해 중국의 제안을 설명했다. 논평은 일본이 역내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중국에 대항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인도의 부상에 경계심을 드러냈다. "동방을 보자(Look East)"는 인도의 정책을 워싱턴-도쿄-뉴델리를 잇는 중국 포위 전략으로 간주했다.

인민일보는 이번 정상회의에서 아시아경제공동체(AEC)를 구성하자는 인도의 제안이 "환영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베이징은 인도의 참여로 인해 역내 힘의 균형에 변화가 초래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아무튼 중국이 EAS 구조를 이원화하려는 제안은 곡절 끝에 한국과 미얀마.말레이시아 등의 지지를 받았다. 중국은 바다위 총리가 향후 EAC 구성에서 APT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부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중국의 승리가 부분적인 것은 중국의 의도에 억제가 동반됐기 때문이다. 제2회 EAS를 개최하겠다는 베이징의 제안이 거부된 것이다.

EAS는 매년 아세안 정상회의와 함께 아세안 국가 내에서만 개최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렇게 해서 아세안은 EAS의 허브가 되고, APT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한 인도 외교관은 아세안+3 입장 강화를 가져온 결정에 실망을 표시했다. 중국도 동남아판 SCO를 건설하려 했던 계획이 좌절돼 흥미가 반감됐다. 이에 중국은 러시아와 미국도 EAS에 참가시키자고 제안했다. 이는 EAC를 아태경제협력체(APEC)와 다를 바 없게 만드는 것이다.

중.일, 중.인도 관계의 해빙 없이 EAC는 비상하지 못할 것이다. EAS는 기껏해야 APEC과 같이 진정한 공동체 건설은 실현하지 못한 채 정상들이 만나 그저 선언문 정도를 발표하는 '말 잔치'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모한 말릭 하와이 아태안보센터 교수

정리=유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