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노트] 권혁-박정진 혹사의 표면과 이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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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4일 대전 한화-삼성 경기. 구원등판한 한화 권혁(32)은 1과3분의2이닝동안 무실점으로 홀드를 기록했다. 이날 3-5로 진 류중일(52) 삼성 감독은 "권혁이 참 잘 던지더라. 우리한테는 살살 좀 던지지…"라며 입맛을 다셨다.

2002년 삼성에 입단했던 권혁은 좌투수 역대 최고인 시속 156㎞의 강속구를 던졌다. 2007년부터 삼성 불펜의 주축이었지만 2010년 이후엔 부상과 부진에 시달렸다. 지난해 38경기(34이닝)에만 나왔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한화로 이적했다. 삼성에서 권혁의 역할은 원포인트 릴리프에 그쳤다. 팀 내 FA는 꼭 잡는 삼성도 권혁은 별 미련없이 떠나보냈다.

권혁은 대전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한화가 치른 33경기 가운데 그는 21경기(32이닝)에 등판했다. 불펜투수 가운데 최다 이닝을 던졌다. 사흘 연투도 세 차례나 된다. 권혁이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한화 팬들은 목이 터져라 그를 응원한다. 권혁은 "힘들지 않다. 행복하다"고 했다.
삼성 시절 그와 배터리를 이뤘던 현재윤 해설위원은 "권혁은 삼성 투수들이 신나게 공을 던지는 걸 부러워했다. 현재 한화 불펜에서는 권혁이 최고다. 자기 덕분에 팀이 이기고, 팬들이 환호하니 힘든 줄 모르고 던진다. 권혁이라는 투수를 재발견한 극적인 반전"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진 권혁의 정신이 육체를 지배했다. 그러나 여름 이후에도 이렇게 던진다면 어떨지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한화의 왼손 불펜 박정진(39)도 예전과 다른 야구를 하고 있다. 2012년 이후 한 시즌 50이닝 이상을 던진 적이 없는 그가 이미 21경기에서 24이닝을 소화했다. 사흘 연투도 세 차례나 된다. 우리 나이로 마흔인 박정진이 죽을 힘을 다해서 던지면 후배들은 더 긴장하고 집중하게 된다.

한화 투수코치 출신 정민철 해설위원은 "박정진은 원래 좋은 공을 갖고 있었지만 이틀 연투가 어려운 투수였다. 지난해까지는 그 점을 감안해 등판 간격을 조절했다"며 "올해 박정진은 전혀 다르더라. 모두가 그의 한계라고 생각한 지점을 뛰어넘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겨울 부임한 김성근(73) 감독은 두 베테랑을 '관리'하지 않았다. 투구 자세부터 마음가짐까지 싹 바꿔놨다. "그대로 두면 그저 그런 선수로 끝나 버린다"는 게 김 감독의 지론이었다. 제구가 안 됐던 권혁, 연투를 못했던 박정진이 달라지자 한화는 한층 강해졌다.

지난 6년간 5차례나 꼴찌를 했던 한화는 올해 치열한 중위권 싸움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2015년 프로야구의 최고 히트작은 김성근(감독), 권혁·박정진(주연)의 한화다. 미지근하게 끝날 것 같았던 둘의 야구는 지금 불꽃을 피우고 있다.
한화의 돌풍은 권혁·박정진을 혹사한 대가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달 9경기에 권혁·박정진이 6차례씩 등판하자 논란이 커졌다. 던질 기회만 기다리던 이들이 혹사를 당하는 반전에 이른 것이다.

둘이 무리한 등판을 한다는 건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김 감독도 이를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권혁·박정진이 태우는 불꽃을 오래가도록 하는 것이, 제2의 권혁·박정진을 만드는 것이 감독의 책임이다. 그래야 한화의 드라마가 단막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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