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가득한시] '걸음을 멈추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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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걸음을 멈추고 - 나희덕(1966 ̄ )

그 나무를

오늘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제의 내가 삭정이 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이십년 후의 내가 그루터기에 앉아 있는 것 같아

한쪽이 베어져나간 나무 앞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덩굴손이 자라고 있는 것인지요

내가 아니면서 나의 일부인,

내 의지와는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자라나

나를 온통 휘감았던 덩굴손에게 낫을 대던 날,

그해 여름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을 용서한 것은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릅니다.

덩굴자락에 휘감긴 한쪽 가지를 쳐내고도

살아 있는 저 나무를 보세요

무엇이든 쳐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그해 여름, 그러나 이렇게 걸음을 멈추는 것은

잘려나간 가지가 아파오기 때문일까요

사라진 가지에 순간 꽃이 피어나기 때문일까요.


너무 어렵다 용서는. 해주기도 싫다 용서는. 어림도 없다 용서는. 너그러운 척, 괜찮은 척, 이해하는 척 하기 싫다. 그러나 용서 못하는 나 때문에 내가 병들어 눕는다. 용서하기로 한다. 아아, 그대를 용서해주는 나, 너무 잘났다. 눈물이 터진다. 엄청난 꽃이 발밑에 핀다. 김경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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