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고사는 「생각하는 힘」길러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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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86학년도부터 대학입시에서 각 대학별로 논술형 고사가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객관식 고사를 치러온 우리의 상황에서 새로운 논술형 고사의 실시는 학생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대학입학시험의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에 대학입시의 조그마한 변화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회오리바람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중한 대책이 필요하다.
우선 그 동안의 논의와 발표에 의하면 그러한 문제에 대한 대책이 여러 각도에서 검토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생활주변에서 주제를 찾아 고사의 범위를 비교적 명백하게 하거나 채점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복수로 채점위원을 정하는 등은 적절하고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 채점에 소요되는 시간을 고려하여 입학시험이 한두 달 앞당겨지는 문제도 당연히 고려되어야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2학기가 거의 시험으로 계속되어 입시의 열기가 과열되거나 아니면 시험이 일찍 끝나는 학생들이 3월의 신학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문제 등이 있을 것이다. 또 교육과정의 조정과 함께 회사의 취업시험 시기 등의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아직도 시간이 있으므로 적절한 대응책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문제가 다각적으로 검토된다고 해서 논술고사를 대학입시에 포함시킨 근본적인 목적이 달성될 수 있을 것인가? 논술고사의 실시와 함께 고려해야할 점은 바로 이점이다. 논술고사 실시의 목적은 대학입학에 있어서의 대학 측의 자율성 존중 등 다양하게 거론 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단편적인 정보나 지식의 암기력 향상보다도 학생들의 조직적 표현력, 근거를 들어서 자기의 주장을 펼 수 있는 능력, 문제 해결력, 비판적 사고력 등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자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목표의 달성은 현재 사회에서 요청되는 인간의 능력이나 사회적 상황으로 보아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입시제도의 변화만으로 그러한 목표가 달성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예컨대 몇 가지 예시된 주제를 놓고5백자나 7백자 등 제한된 글자수의 범위 안에서 글 쓰는 기계와 같은 훈련을 고등학교측에서 실시한다면 이번 제도의 변화는 하나의 혼란을 더할 뿐 종래의 객관식 고사의 한계를 별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입시제도의 변화과정에서 유럽의 논술형 고사의 예가 자주 예시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이나 미국의 초등학교나 중·고교의 수업방법이 우리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데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곳에서는 우선 20명 내지 30명의 학생들이 국민학교 때부터 「이 문제의 가설은 무엇인가」「대안은 무엇이며,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이러한 자료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며, 그 한계는?」등의 내용을 가지고 서로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 바로 학교수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수업에서 그러한 고사의 형태가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자녀의 진로결정에 있어서는 학부모들이 학교측의 결정을 대부분 따를 만큼 교사의 권위를 존중한다.
논술형 고사에서는 원래 전문가로서의 채점자의 판단과 권위가 존중되어야 한다. 또 논술형 고사는 아름다운 표현을 구사하는 글짓기보다는 합리적이고도 조직적인 사고력의 측정에 그 핵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어학계통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등 광범위한 전문가의 협동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초·중·고교의 교육현장 여건형성이 중요하다. 이렇게 되어야 논술형 고사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논술형 고사에는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가 수반되기 때문에 86년도에 모든 대학이 한꺼번에 실시하는 것보다도 몇 학교가 실험적으로 실시하여 그 결과를 평가하고 수반되는 문제들을 면밀히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실험대학과 졸업정원제가 몇 년 안에 다시 수정되어야 했던 그런 혼란이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1천만에 가까운 학생들이 입시제도 변화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여론의 반영이나 채점편의에 관한 문제보다 논술형 고사의 본질을 살리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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