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비뚤어진 경찰 입법 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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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은 인터넷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 국회 행자위에 계류된 공무원법 개정안을 어떻게 처리할지 참고하기 위해서다. 26일 오후 4시 현재 중간 집계 결과는 놀랍다. 참여인원 2807명 중 무려 97%가 찬성이다. 반대는 단 59명. 게시판은 '하위직 6급''7급''서울 하위직' 등으로 밝힌 지지 글로 도배가 돼 있다.

유 의원은 "이걸 제대로 된 여론으로 봐야 할지 당황스럽고 무섭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문 여론조사기관에 맡겨야겠다"고 했다.

공무원의 집단 이기주의가 국회 입법활동을 위협하고 있다. 순진한 입법 청원 방식은 옛말이다. 자신의 이해가 걸린 법안을 다루는 국회의원에게는 사이버 공습을 감행한다. 인터넷 밖으로 뛰쳐나와 낙선운동으로 의원을 협박하기도 한다.

경찰공무원법 개정안 처리 때 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전.현직 경찰공무원 모임인 무궁화클럽은 회원에게 "행자위.예결위.법사위 소속 의원과 보좌관을 상대로 집중 홍보하라"는 e-메일을 보냈다. "홍보에 경찰 가족을 적극 활용하라"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뒤늦은 거부권 논란도 따지고 보면 비뚤어진 입법 로비의 결과다. 한 의원은 "법안을 요모조모 뜯어봐야 하는데 사실 이런 로비에 시달리다 보면 '나 하나쯤…'하면서 그냥 찬성 버튼을 누르게 된다"고 실토했다.

7만8450명(경사.경장.순경을 합친 숫자)의 처우 개선이 중요하다면 부담을 나눠가져야 할 4700만 명의 동의를 얻는 일은 더 중요하다. 잘못된 집단 이기주의의 표에 편승하려는 국회의원이 더 문제다.

경찰공무원법 개정안이 거부권 대신 보완입법으로 결론난 뒤 법안 발의자인 최규식 의원의 홈페이지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글이 올라 있다.

'근속 승진과 수사권 조정의 선봉에 서서 우리 조직을 이끄는 경찰청장님이 농민 사망으로 위험한 지경에 있다. 조직의 수장을 위해 무언가 할 때….'

'승진보다 경찰관의 처우개선, 즉 복지문제에 관심을… 열심히 순찰합시다.'

박승희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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