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064>|제80화 한일회담(263)|4·3합의 요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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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동원·「시이나」한일 양국외상은 철야까지 하며 4차례의 공식회담을 했음에도 현안의 정치적 절충에 성공하지 못했다.
최종적인 쟁점은 △어업문제 중 기국주의의 재고△청구권내용의 표기문제 △법적지위 중 처우문제 등에 관한 것이었다.
차·「아까기」농상회담에서 해상검색방법으로 합의된 기국주의에 대해서 양국외상도 동의했으나 우리측은 위반선박에 대한 증거보전방법으로 최소한 정선명령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 측은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차·「아까기」합의를 검토, 공동규제수역내의 규제방법(기국주의)에 대한 국내의 반발이 심각한 점을 감안해 최소한 정선명령만이라도 할 수 있는 규정을 삽입하라고 훈령해왔던 것이다.
역시 어업문제는 최대쟁점이었던 만큼 마지막까지 진통을 거듭했고 결국 위반어선에 대해상대방감시선에 통보하여 규제토록 하는 것으로 낙착됐다. 4월 1일 하오4시부터 2일 상오6시30분까지 장장 14시간동안 계속된 협의 끝에 마련된 난산이었다.
그에 비해 청구권문제는 나와 「우시바」차석대표가 3월 31일 협상을 끝맺음했다. 무상제공 3억 달러, 장기저리차관 2억 달러, 민간신용제공 3억 달러가 골자였다.
최후까지 이견을 보였던 것은 장기저리차관의 상환조건으로 우리측이 거치 기간 7년을 거쳐 20년간 상환하자는 것이었는데 비해 일 측은 거치 기간 7년을 포함해 20년간에 상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측은 결국 일 측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 다른 골자는 일 측이 우리의 선박반환청구권 주장에 대해 김·「오오히라」메모로 해소됐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평화선친범혐의로 나포되어 몰수됐던 일 어선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하고 나왔던 것이다.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상살형식으로 서로 주장치 않기로 함으로써 타결됐다.
또 일 측은 청구권문제타결로 문화재문제도 자동처리 됐다고 강변했으나 나는 청구권과 문화재는 별개의 문제라고 강력히 주장해 최후까지 청구권문제의 현안이 되었다. 일 측이 결국 문화재를 「인도」한다는 표현으로 응해 청구권현안의 결말을 보았던 것이다.
청구권타결에 관해서는 「시이나」외상의 결단이 큰 기여를 했다.
「시이나」 외상은 대장성 등 관련부처의 반발로 좀처럼 돌파구가 열리지 않자 국회출석 중 우리측 입장을 메모한 쪽지를 가지고 「사또」수상, 「다나까」장상, 「아까기」농상 등 관계장관이 모인 국회 각의실로 가서 『「다나까」장관, 남자답게 동의하라』고 강박해 마침내 동의를 받아냈다고 한다.
당시 각의실 밖에서 대장성 이재국장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우시바」차석대표는 『얼마 후 「시이나」외상이 나오면서 「다나까」장상의 서명이 담긴 메모를 보이며 「다나까」씨도 동의했다고 말하자 이재국장은 상관인 「다나까」장상에 대해 「저런 머저리 같은 바보-」라고 고성으로 노골적인 반발을 감추지 않았다』고 나에게 상황을 전해주었다.
일 측은 또 재일한국인의 처우향상약속을 법적지위 협정문안에 명기하자는 우리 측 주장을 결국은 받아들였다.
이 장관은 3월 27일 공식방문기간이 끝난 후 이 같은 난제를 풀고 가조인까지 하고 귀국한다는 결의로 귀국일자를 하루단위로 늦춰가며 4월 3일까지 교섭에 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현안에 대한 대강의 합의를 놓고 다시 조문화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일단 합의요강형식으로 가조인 키로 낙착을 보았다.
이른바 「4·3합의요강」이다. 이것은 사실상 14년간의 한일교섭을 일단락짓는 성격을 띠었다. 양측실무대표의 두문자로 4월3일 서명된 합의문서는 △청구권문제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합의사항 △재일한국인의 처우에 관한 합의사항△한일간의 어업에 관한 합의사항 등 3가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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