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신화' 메스너 국내 첫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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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86년 10월 16일 라인홀트 메스너(59.이탈리아)는 42세의 나이로 히말라야 로체봉(8천5백16m) 정상을 밟았다. 히말라야의 8천m 고봉 14좌 모두를 정복하는 인류 최초의 등반가가 된 것이다.

그는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78년)과 단독 등정(80년), 82년에 한 시즌 3개봉(칸첸증가.가셰르브룸Ⅱ.브로드피크) 동시 등정, 84년에 가셰르브룸Ⅰ(8천68m).Ⅱ봉(8천35m) 종주 등반이라는 불후의 기록도 세웠다.

메스너에게 히말라야 등반은 위대한 도전이며 산에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산을 경쟁 상대로 삼지 않았고 등반을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즐겼을 뿐이다. 27~29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에베레스트 등정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53년 5월 29일 인류 최초의 등정에 성공했던 에드먼드 힐러리경을 비롯해 최초의 여성 등정자인 다베이 준코(일본), 메스너, 한국의 엄홍길(43) 등 세계적인 산악인들이 몰려들었다.

중앙일보는 한국 언론으로서는 처음으로 라인홀트 메스너를 만나 등반 철학과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당신은 70년 낭가파르바트(8천1백25m) 루팔벽 초등으로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당신의 새로운 등반 스타일엔 질시어린 찬사가 따라다녔던 것으로 안다.

"알프스에 몰두하던 나는 68년부터 히말라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낭가파르바트와 마나슬루(8천1백63m)를 오른 후에는 알프스의 등산 방식을 히말라야에 적용했다. 대규모 원정대를 동원하지 않고 한두명이 직접 장비를 짊어지고 속전속결로 올라가는 '알파인 스타일'이었다. 원정대의 자금을 구하기 어려운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8천6백m에서는 산소 없이 활동할 수 없다'는 상식을 깬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도 알파인 스타일을 추구한 결과다. 나는 등정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고전적인 등반가(Classical Alpinist)는 아니다. 대신 '정신적인 힘(Mental Power)'을 중요시한다.도전을 창조하는 능력, 목표를 이뤄내는 성취욕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서전에서 '등산의 참다운 기술은 살아남는데 있다'고 밝혔다. 16년간 히말라야를 오르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언제였나.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초등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감을 느낀 사건이면서 가장 힘들었던 곳이다. 10분 간격으로 눈사태가 쏟아지는 그곳에서 동생 귄터의 죽음을 보아야 했다. 로프나 식량도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3일에 걸쳐 하산했다."

-86년 10월 16일 한스 캄머란더와 로체 정상을 밟으면서 14좌를 완등했을 때 어떠한 느낌이었나.

"아무 생각이 없었다. 베이스캠프에 내려와서야 '나만의 스타일에 의한 등반이 끝났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히말라야 등반을 그만뒀다. 90년대 들어 북극점 횡단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신이 14좌를 완등할 당시와 요즈음의 알피니즘은 어떻게 달라졌나. 히말라야 원정에 대해 젊은 산악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70~80년대의 셰르파는 짐만 옮겨주었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셰르파가 깔아놓은 길을 따라 등반하고 있다. 에베레스트의 경우 아이스폴에 사다리를 놓거나 루트를 보수하는 일도 요즘은 등반가들이 아니라 셰르파가 한다. 등반가가 자신의 일을 셰르파에게 맡기고 산을 오른다면 그건 관광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로 위험과 어려움을 헤치고 정상에 올라야 희열을 맛볼 수 있다. 등반가 스스로 루트 공략을 하는 것이야말로 히말라야 등반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안간 곳을 가라'고 말하고 싶다. 등반은 높이가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이 중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똑같이 걷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지금 도전해봐라. 등반가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는 것만으로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은 잘못이다."

-한국은 4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14좌 완등자를 두명이나 배출해 냈다. 한국 산악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산악계는 72년 마나슬루에서 원정 사상 가장 큰 사고를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당시 마나슬루의 반대쪽 사면에 있었다. 그후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2000년에 엄홍길씨가 14좌 완등에 성공한 것도 알고 있다. 이번 시즌 에베레스트 첫 등정자도 엄홍길씨다. 히말라야 원정은 나라의 경제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 산악계가 히말라야에서 펼치는 활발한 활동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너무 아름답다."

-88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겨울 올림픽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당신과 예지 쿠쿠츠카(폴란드)에게 메달을 수여하려 했으나 당신은 거부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나.

"메달을 받는다는 것은 등반이 경쟁임을 자인(自認)하는 것과 같다. 수영이나 스키 등은 게임이지만 등산은 그렇지 않다. 같은 산을 오른다 해도 루트가 다른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나. 이것이 수상을 거부했던 이유며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동안 두명의 동생을 산에서 잃었다. 마음의 짐이 무겁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추억과 흔적은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하는 법이다. 바로 아래 동생 귄터는 나의 영원한 파트너였다. 32년 전 낭가파르바트를 같이 등정하다 하산길에 죽었다. 지난 해에 귄터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벌거벗은 산(The Naked Mountain)'을 출간했다. 귄터의 죽음은 나의 책임이다. 둘째 동생 지그프리트는 85년 알프스에서 가이드를 하다 번개에 목숨을 잃었다."

-이제 60의 나이를 바라보게 됐다. 어떤 생활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

"북이탈리아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한살짜리 막내를 비롯한 다섯 식구가 농사를 짓고 40마리의 야크를 키우며 평범하게 살고 있다. 4명의 자식 중 가장 큰 아이(22)는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현재 내 인생의 중심은 아이들이다. 사람은 나이에 맞게 자신의 생각을 바꿔가며 살아야 한다. 61세가 되는 2005년부터 사막을 횡단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아마도 무척 바쁠 것 같다."

그는 '히말라야 설산에 올라 눈구덩이를 파고 요기(요가 수행자) 생활을 해볼까 한다'는 농담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카트만두=김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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